'채 상병 사고' 규명 안갯속… 항명·외압 등 진실게임 양상
前수사단장, 군검찰 수사 거부 이어 공수처 고소·고발 예정
수사심의위 소집도 신청… "제3기관서 기소 여부 결정해야"
- 박응진 기자
(서울=뉴스1) 박응진 기자 = 지난달 집중호우 피해 실종자 수색 중 순직한 고(故) 채수근 상병 사고 발생 경위와 그에 따른 군 관계자들의 책임 소재 여부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이 사실상 '올스톱'된 모습이다.
채 상병 사고 초동조사 결과를 담은 해병대 수사단의 자료가 이달 2일 민간 경찰에 이첩됐다가 국방부로 회수된 데다, 수사단장이었던 박정훈 대령이 '항명' 등을 이유로 보직 해임되면서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사건이 흘러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박 대령은 자신에 대한 군검찰 수사를 거부하겠다고 밝힌 채 항명 혐의 성립 여부, 국방부 관계자들의 외압 여부를 놓고 연일 장외에서 국방부와 공방을 벌이면서 '진실게임'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군 당국은 국방부 조사본부를 통해 해병대 수사단의 채 상병 사고 조사 기록을 재검토한 뒤 경찰에 재이첩한다는 계획이지만, 정치권에선 박 대령 문제를 이유로 이미 국정조사 등의 얘기까지 나오고 있어 사건의 핵심인 채 상병 사고 원인을 규명하기까진 앞으로도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해병대 제1사단 포병여단 제7포병대대 소속이던 채 상병(당시 일병)은 지난달 19일 경북 예천군 내성천에서 구명조끼 착용 없이 실종자 수색을 하던 중 급류에 휩쓸려 숨졌다.
해병대 수사단은 임성근 1사단장 등 군 간부 8명의 '주의 의무 위반'이 채 상병 사고의 한 원인이 됐던 것으로 보고 이들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민간 경찰에 이첩하려고 했다. 이종섭 국방부 장관도 지난달 30일 이 같은 내용이 담긴 해병대 수사단 보고서를 결재했다.
그러나 이 장관이 보고서 결재 하루 만인 지난달 31일 해병대 측에 '조사 결과 공개와 경찰 이첩을 보류하라'고 지시한 뒤 국외 출장(우즈베키스탄·7월31일~8월3일)을 가면서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국방부는 이 장관의 이첩 보류 지시는 '경찰 이첩시 군 관계자들의 혐의가 적시되면 향후 수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법무관리관실 검토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반면 박 대령은 이달 2일 오전 채 상병 사고 조사 기록을 관할 경찰인 경북경찰처에 보낼 때까지 '이첩 보류'를 명시적으로 지시받은 적 없고, 오히려 이 과정에서 국방부 관계자들로부터 '사단장은 혐의대상에서 제외하라'는 취지의 외압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 대령에 따르면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이 채 상병 사고 보고서 내용과 관련해 수차례 불만을 제기하며 수정을 요구했고, 신범철 국방부 차관 또한 김계환 해병대사령관을 통해 그와 비슷한 문제 제기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 관리관은 채 상병 사고와 관련해 구체적인 혐의대상·내용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직접적인 과실이 있는 사람만 혐의대상에 포함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얘기를 했을 뿐이고, 신 차관 또한 '특정인을 배제하란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없다'며 맞서고 있다.
이와 관련 군 안팎에선 박 대령과 유 관리관, 김 사령관과 신 차관의 휴대전화에 당시 통화 내용이 녹음돼 있을 경우 박 대령이 주장한 이른바 '외압' 의혹의 실체를 밝히는 '스모킹건'이 될 수 있단 관측이 제기된다.
박 대령은 이미 군검찰을 통해 휴대전화에 대한 디지털 포렌식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다른 인사들의 휴대전화(군용 비화폰(도청 방지 기능이 탑재된 휴대전화) 포함)까지도 이 같은 포렌식이 이뤄졌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김 사령관은 신 차관과 통화한 지난달 31일~이달 1일 사이 박 대령에게 "비화폰도 포렌식할 수 있느냐"는 취지의 질문을 했다고 한다.
국방부 관계자들의 외압 의혹과 더불어 김 사령관이 박 대령에게 '경찰 이첩 보류'에 관한 명시적 지시를 언제 어떻게 했는지도 쟁점으로 떠오른 사안 가운데 하나다. 관계 법령 해석상 해병대 수사단장은 해병대사령관으로부터만 개별 사건 처리에 관한 명령·지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박 대령의 '항명' 혐의가 성립되려면 이 부분이 먼저 규명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와 관련 해병대 측은 김 사령관이 지난달 31일 오후 4시 참모회의 때 '이달 3일 장관 해외 출장 복귀 이후 조사 자료를 보고하고 이첩할 것'을 박 대령에게 지시했고 밝혔다.
그러나 박 대령은 이달 2일 오전 경찰 이첩 직전까지도 김 사령관이 '국방부에서 혐의자를 빼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취지의 질문만 반복적으로 해왔을 뿐 보류 지시는 없었다는 입장이다.
채 상병 사고 자체와 관련해선 '임 사단장 이하 간부 8명에게 책임이 있다'고 본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결과가 국방부 조사본부의 재검토 과정에서도 유지될지 여부가 관심이다.
해병대 수사단은 '임 사단장이 채 상병 소속 부대가 실종자 수색에 투입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리는 바람에 구명조끼 등 안전장구를 챙기지 못했다'는 이유로 '임 사단장에게도 명백한 책임이 있다'고 봤다.
또 채 상병과 함께 실종자 수색에 나섰던 초급 간부 4명은 '간부들이 가장 위험한 곳에 위치하라'는 지시가 있었음에도 현장 통제를 소홀히 해 병사들이 수심이 깊은 곳으로 가도록 했다는 게 해병대 수사단의 판단이었다.
게다가 임 사단장은 해병대 수사단 조사 과정에서 '수해 복구 작전의 핵심은 실종자 수색작전임을 얘기했다'고 진술한 반면, 다른 간부들은 이를 듣지 못했다고 해 그에 대한 규명 역시 필요해 보인다.
이외에도 정치권에선 이 장관이 해병대 수사단 보고서를 결재한 지 하루 만에 사실상 '번복'한 배경을 놓고 이른바 '윗선' 개입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박 대령에 따르면 지난달 30일 오후 이 장관으로부터 채 상병 사고 조사 결과 보고서 결재를 받은 뒤 국가안보실 파견 장교로부터 '조태용 안보실장에게도 보고해야 하니 보고서를 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수사 중인 사안이라 보내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 대령은 이후 김 사령관이 직접 '보고서를 보낼 수 없으면 언론 브리핑용 자료라도 보내라'고 연락해와 수사단 관계자를 통해 해당 자료를 보냈다고 한다.
이 자료에도 채 상병 사고 발생 경위와 임 사단장 등 간부들의 책임 소재 판단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자료는 이튿날 이 장관의 지시로 언론 브리핑 또한 취소되면서 사용되지 못했다.
박 대령 측은 이 장관과 유 관리관 등이 '채 상병 사고 조사와 경찰 이첩을 방해하기 위해 직권을 남용했다'는 이유로 오는 14일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 고소·고발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령 측은 또 14일 군검찰 수사심의위원회 소집도 신청할 계획이다. 박 대령 측은 "국방부 검찰단이 대통령령인 '법원이 재판권을 가지는 군인 등의 범죄에 대한 수사절차 등에 관한 규정'을 위반하고 위법하게 수사해 공정성을 믿지 못한다"며 "수사심의위에 회부해 제3의 공정한 기관에서 기소 여부 결정을 받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군검찰 수사심의위는 '국민적 의혹이 제기되거나 사회적 이목이 집중되는 사건'에 대해 '군검찰 수사의 절차·결과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제고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하는 기구다. 국방부 검찰단이 그 소집을 결정하면 각계 민간 전문가들로 구성된 수사심의위가 국방부 검찰단의 수사결과를 바탕으로 기소·불기소 등을 권고하게 된다.
따라서 수사심의위 소집 신청이 수용되면 박 대령이 국방부 검찰단의 조사에 다시 응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다만, 박 대령은 최종적으론 자신의 항명 혐의 등에 대한 수사를 공수처에서 담당해주길 바라는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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