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식의 시선]무섭지만 성숙한 시민을 '잔머리 정치'가 따라갈까

대통령 2차 사과...여야 리더, 비상 시국회의로 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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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언론의 추적보도와 박근혜 대통령의 느닷없는 사과로 밀실권력 추문, 이른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판도라 상자의 뚜껑이 열린 뒤 만나는 사람마다 모멸감과 자괴감, 분노와 배신감으로 가득찬 한탄을 쏟아냈다. 박 정부의 헌법적 정통성을 뿌리째 뽑아버린 이 스캔들은 당사자들의 무능과 무책임, 전횡과 비리에 그치지 않고 정치 리더십 붕괴와 정부 기능의 마비, 국민적 자부심의 추락 등 국가적 위기로 번져가고 있다. 더구나 박 대통령이 지난 주말 심사숙고했다며 내놓은 ‘나홀로 개각’ 이 민심을 거스른 공세로 비치면서 공공연히 대통령 퇴진 요구가 나오는 지경이니 더욱 혼란스럽다.

그래서 사람들은 묻는다. 답답하고 한심해서, 어처구니없고 황당해서, 화풀이할 곳이 없고 내일이 걱정돼서. 질문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근본도 없는 저자거리의 무속적(巫俗的) 아낙네가 ‘권력서열 1위’라는 풍문이 나돌 정도로 위세를 부리며 국정을 농단하는 동안에 정치권과 언론은 뭘 했느냐는 추궁이다. 정치권이 제 밥그릇 챙기고 자리 따지는 열정의 반, 아니 반의 반만 발휘했더라도, 또 그 숱한 언론 가운데 몇 개라도 좀 더 일찍 권력과 시장감시라는 본연의 책무에 눈을 떴다면 이런 참담한 지경에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에서다.

물론 권력에 취한 그들이 남긴 꼬리를 집요하게 추적해 비밀스러운 판도라 상자를 열어젖힌 몇몇 방송과 신문의 공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늦게나마 언론이 (보수 진보의) 이념 지형을 떠나 치밀한 퍼즐 맞추기로 민주공화국을 점령하려던 타락한 권력을 드러냈다”고 평가하는데 인색하지도 않다. 하지만 미혼 대통령이 하루의 반 이상을 관저에서 혼자 지내는 비정상적 상황에 대한 의구심을 쉽게 접은 데다 재임 중 터져나온 정윤회 문건, 대통령의 7시간, ‘듣보잡’ 인사 등 숱한 수상한 실마리들마저 소홀하게 지나친 정치권과 언론의 무책임과 역할 방치는 변명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둘째는 이 난국을 어떻게 풀어가야 국정 파행을 최소화하고 상처받은 주권자의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대통령 즉각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 및 시국성명이 줄을 잇는 가운데 대통령의 2선 후퇴 및 거국중립내각을 요구하는 주장, 헌정 중단을 피하려면 대통령 탈당 및 책임총리제가 보다 현실적이라는 제안, 또 대통령과 여당의 석고대죄가 먼저라는 요구 등 말은 많지만, 어느 것도 ‘질서있는’ 로드맵이 아니어서 혼란만 부추기는 까닭이다. 비상한 시국을 맞아 대권주자 등 정치지도자들이 사심없이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찾을 법도 하지만, 사적인 욕망과 계산이 끼어든 탓에 눈치만 보며 하늘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형국이다.

박 대통령이 ‘수사 자청 등 고해성사 후 국회 주도의 거국중립내각 구성’으로 모아가는 듯 했던 국민적 요청에 아랑곳없이 일방적인 내각과 청와대 개편 카드를 던진 것은 리더십없고 무질서한 정치권의 약점에 대한 반격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순실 공백 탓인지 대통령의 상황인식과 대처방식은 정치권 이상으로 안일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다. 30년 이상 생사고락을 같이해온 사람에게 의지하며 편의를 좀 봐준 것이 헌법적 권력을 내놓을 만큼 잘못된 일인가, 설사 재벌 모금 종용 등 좀 잘못된 점이 있다고 해도 북핵과 민생의 복합위기를 덮친 상황에서 대통령의 자리를 함부로 내놓을 수 있는가, 어차피 권력게임이라면 물러날 때 물러나더라도 끝까지 책임지는 게 리더의 자세 아닌가. 지지도가 한자릿수로 추락하고 탄핵·하야 여론이 50%에 육박한다지만 여론이란 늘 바뀌는 것 아닌가 등등…. 여하튼 헌정중단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대통령과 정치권이 엇박자를 내며 정국을 극도의 긴장상태로 몰아가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필자는 지난주 칼럼(☞‘질서있는 최순실 게이트 관리의 전제조건)에서 정치권이나 시민단체 등의 중구난방식 제안이나 무질서한 분노 표출의 위험성을 경계한 바 있다. 정서나 감성으로는 하야·탄핵 등의 요구와 주장이 나오는 게 무리는 아니지만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역풍과 반동에 길을 내줄 수 있다는 우려, 그리고 ‘역사는 비극으로 또 희극으로 반복된다’는 교훈이 생각나서다. 지난 주말 민중총궐기투쟁본부가 주도한 ‘모이자! 분노하자!#내려와라_박근혜 시민촛불’시위에 참석한 시민들이 분노를 곱씹으면서도 이성적인 자제력을 발휘한 것은 이런 맥락이리라.

그래서 다시 제안하고 싶다. 유일한 리더십 대체세력인 정치권의 명망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끝장토론으로 합일된 시국수습 로드맵을 만들고 그 그림으로 국민과 대통령을 끌고가라는 것이다. 그래야 하야든, 탄핵이든, 고해성사든, 거국내각이든, 책임총리든, 개헌이든, 뭐든 박 대통령도 살길을 찾지 않겠는가. 박 대통령이 2차 사과에서 보여준 인식으로도 길을 찾을 것 같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최근 여야 지도자나 대선주자들이란 사람들이 강건너 불보듯 던지는 말들이 너무 가볍고 무책임하게 느껴져서 하는 말이다. 근현대사 격변기에서 그토록 많은 시련과 굴곡을 경험하고도 같은 잘못을 반복할 수는 없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정치지도자들이 시국회의 한번 하지 않고 자기 주장만 하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지혜를 짜내는데 성역은 있을 수 없고 값싼 정치적 계산이 끼어들 수도 없다.

국민들이 '그 나물에 그 밥'으로 치부하는 정치권에 뭘 기대하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다. 남이 차려준 밥상에 숟가락만 들고 나타나 반찬 투정하는 격이라고 정치권을 비난하는 말도 들린다. 실제로 정국의 향배는 청와대나 정치권의 언행이 아니라 주말인 5일과 12일로 예정된 도심 시위의 규모와 양태로 결정될 것이라는 전망도 많다. 울분과 자괴감을 이성과 합리로 녹여낸 무서운 국민들이어서다.

이처럼 상황이 유동적인 만큼 역설적으로 의지할 곳은 정치권의 리더십과 언론의 치열함 뿐이다. 그 리더십과 치열함은 ‘박-최 게이트 망령’을 키운 ‘재벌-검찰-정치권-국정원-언론의 침묵커넥션’(☞ 이희정'똥바다와 병신오적')을 깨는 일부터 시작할 일이다. 특히 '부자 몸조심'하는 배부른 야당과 시장논리에 매몰된 언론의 자각이 없는 한 비극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민주공화국으로서의 반성과 희망은 두 곳에서 시작된다. 하나는 게이트를 추적해온 한겨레 김의겸 선임기자가 기자협회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소회다 “취재를 하면서 최순실과 박 대통령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사회의 기업과 고위공직자 행태를 보면 출세나 성공하고 싶으면 비선실세에 복종해 사타리를 타고 올라가려 한다. 검찰이든 언론이든 정화기능을 가진 조직이라면 박 대통령이나 최순실에게 선을 대 반칙과 편법을 저질렀거나 저지르려고 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그 사람들이 패가망신할 정도의 교훈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어디선가 말을 타고 있을 너에게’라는 제목으로 익명의 이화여대생 화영이가 최순실의 딸 정유라에에게 보낸 편지다 “나 어제도 밤을 꼬박 새워 과제를 했다. 너는 어제 어디서 뭐했을까.…네가 부모를 잘 만났다고 하더라, 근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정당한 노력을 비웃는 편법과 그에 익숙해짐에 따라 얻은 무능, 그게 어떻게 좋고 부러운지 난 모르겠다. 이젠 오히려 고맙다. 네 덕분에 내 노력이 얼마나 빛나는 것인지, 그 노력이 쌓이고 모인 지금의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실감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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