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2만' 철조망 해변은 어떻게 '서울특별시 양양구'가 됐나?[#서핑성지 양양]

철조망 막힌 초라한 해변 '보라카이, 이비자' 부럽지 않은 핫플레이스로
지난해 양양 관광객 1638만명…서울양양도로 개통 '결정적 한방'

편집자주 ...인구 소멸의 시대. 인구 2만 동해안의 소도시 양양은 '서핑' 하나로 연간 1600만명이 찾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 핫플레이스가 됐다. 속초와 강릉 사이에서 볼품 없었던 시골해변은 어떻게 MZ세대의 성지로 변했나. '서핑 성지' 양양의 시작과 현재, 그리고 미래를 들여다보자.

강원 양양군 현북면 중광정리에 위치한 '서피비치' 이미지.(서피비치 제공) 2023.27/뉴스1

(양양=뉴스1) 윤왕근 기자 = 멋진 몸매가 드러나는 슈트를 입은 서퍼가 서프보드를 들고 해변을 거닐고, 백사장 라운지에서는 하루 종일 힙한 음악이 울려 퍼진다.

한손에 시원한 브랜드 맥주를 든 전국의 선남선녀들은 야자수 해먹에 누워 거대한 클럽으로 변할 뜨거운 밤을 기다리고 있다.

이는 스페인 이비자나 필리핀 보라카이의 모습이 아니다. 최근 대한민국 최고 핫플레이스로 변한 '서핑 성지' 양양에서 사계절 내내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강원 양양군 현북면 중광정리에 위치한 '서피비치' 모습.(서피비치 제공) 2023.9.27/뉴스1

#양양(襄陽)

오를 양(襄)에 볕 양(陽). '해가 오르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양양은 위로는 속초, 아래로는 강릉과 인접한 강원 동해안 북부지역의 소도시다. 지난 6월 기준 인구수는 2만7817명.

이는 강원도 18개 시·군 중에서도 하위권에 속하는 수준이며, 인구의 다수가 65세 이상인 인구소멸 우려지역이기도 하다.

지금은 대한민국 대표 관광도시가 된 속초시가 원래는 '양양군 속초읍'이었을 정도로, 629.32㎢라는 넓은 면적에 설악산과 동해바다라는 천혜의 관광자원이 가득한 곳이다.

그러나 인접 도시가 워낙 전국구 관광지인 탓에 속초와 강릉을 잇는 길목 정도로 인식돼 왔다. 해변 관광지로는 낙산해수욕장이 있지만 인접한 강릉 경포해수욕장에 못 미친다는 인식이 많고, 설악산이라는 공동 관광자원의 열매는 시로 승격해 이탈한 속초시가 대부분 누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제목처럼 양양의 바다는 쓸쓸함이 먼저 떠오르는 곳이었다.

여름철 성수기 강원 양양 서핑비치로드.(뉴스1 DB)

#서핑(surfing)

우리나라 말로 쉽게 풀면 '판때기'를 타고 파도를 이리저리 빠져나가며 즐기는 놀이다.

'바다'와 '판때기 하나'만 있으면 쉽게 즐길 수 있는 이 단순한 놀이가 인구 2만의 소도시를 천만 관광도시로 탈바꿈 시켰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2022년 한해 동안 양양을 방문한 관광객은 무려 1638만명. 2020년 조사된 1522만명에 비해서도 116만명 많은 수치다. 지역의 전체 인구(2만7817명)의 600배에 달하는 인파가 한해 동안 찾는다는 단순 계산이 나온다.

물론 이는 설악산이나 낙산사, 낙산해수욕장, 물치해변 등 지역 내 다른 명소를 방문한 관광객을 모두 더한 수치다. 그러나 경제논리로 접근해보면 서핑이라는 아이템 하나가 양양을 얼마나 뒤바꿔 놨는지 알 수 있다.

지금은 편의점보다 많은 것 처럼 느껴지는 양양의 서핑샵은 지난 2013년 3곳에 불과했다. 양양지역 서핑샵은 지난 1월 기준 84곳에 이른다.

서핑이 양양을 '서울특별시 양양구'로 만들어놨다는 이야기가 농담처럼 돈다. 땅값 때문이다.

한국부동산원 지가변동률 공표보고서에 따르면 양양군의 지난 2021년 12월 기준 전월 대비 지가 변동률은 0.640%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서울 성동구, 성남 수정구 등을 제친 전국 1위의 기록이다. 설악산이나 낙산사 방문객이 많다고 해서 지역의 땅값이 기하급수적으로 뛰긴 힘들다.

MZ의 성지로 거듭난 이후 서핑샵과 핫한 펍, 대규모 숙박시설, 식당 등이 경쟁적으로 늘어나면서 부터인 것이다.

강원 양양 인구해변에서 서핑을 즐기는 서퍼들.(뉴스1 DB)

#철조망(鐵條網)

해안 접경지인 강원 북부동해안에서는 불과 수 년전 만해도 해안도로 곳곳에서 촘촘히 쳐진 철조망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서핑 성지' 양양의 처음도 철조망을 낀 바다에서 출발했다.

2015년 로컬크리에이터 한명이 군사보호구역이었던 양양군 현북면 중광정리의 해변에 국내 최초 서핑전용해변인 '서피비치'를 조성하면서부터다.

서피비치가 생기기 전 양양에 서핑 문화 자체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인근 기사문이나 죽도해변 등 양양은 이미 서퍼들에게선 좋은 서핑 스팟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다만 당시 양양의 서핑은 '레저'였을 뿐, 현재 양양의 모습처럼 여행이나 문화로 서핑이 소비된다고 볼 순 없었다.

양양 서피비치를 처음 기획·조성한 박준규(45) 라온서피비치 대표는 서핑을 이용해 이곳을 '양양의 보라카이'처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겨울스포츠의 성지인 강원 평창군 진부면 출신인 박 대표는 "직장에 다닐 때 부산 해운대 '스마트 비치' 사업에 참여하면서 바다를 처음 접했다"며 "불편한 것 투성인 바다에 청춘들이 가득한 것을 보며, 이들의 편의를 해결해주고 로망을 실현시켜줄 수 있다면 바다는 정말 좋은 여행 아이템이 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럼 왜 하필 서핑이었을까. 서핑은 바다 여행지의 한계인 '계절'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우리나라 해수욕장 개장 일수는 대부분 45일 안팎"이라며 "그에 비해 서핑은 계절의 영향을 받지 않아 최대 200일까지 사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2015년 7월 이곳에 서피비치가 처음 문을 열었다. 첫 해 방문객은 1만명 정도였지만, 2016년 '코로나 선셋 페스티벌' 등 젊은 층을 겨냥한 축제와 각종 프로그램이 대박을 치면서 폭발적 반응이 시작됐다.

주차장을 방불케하는 서울양양고속도로.(뉴스1 DB)

#서울양양고속도로

지난 2017년 개통한 서울 강동구~강원 양양군을 잇는 60번 고속도로다. 양양이 '서핑 성지', 'MZ의 성지'로 거듭나는 데는 서울양양고속도로의 개통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제 아무리 잘 꾸며놓은 관광지라 해도 오기 힘들다면 대중 여행지로서는 꽝일 것이다. 서울양양고속도로 개통으로 '서울~양양 90분 시대'가 열리면서 양양은 '서핑 성지'가 됐다.

개인 장비를 차에 싣고 다니는 동호인 서퍼도 접근이 쉬워졌고, 경제력이 부족한 젊은층 역시 버스비 1만5300원만 있으면 2시간도 안되는 시간에 양양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장비나 복장을 굳이 챙겨올 필요도 없다. 80여개가 넘는 서핑샵에서 슈트를 빌려 강습을 통해 서핑을 즐기다가 해가 지면 거대한 클럽으로 변한 해변에서 젊음을 즐기면 된다.

2018년 평창올림픽을 기점으로 개통한 KTX강릉선도 양양을 '서핑성지'로 만드는 데 역할도 한몫했다. 또 중장기적으로는 오는 2027년 서울과 속초를 잇는 동서고속화철도가 개통하면 이 같은 분위기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wgjh6548@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