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서해랑길을 가다…⑤'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확인하는 팽목바람길(10코스)
걷다보면 분노와 슬픔과 위로와 희망의 서사가 이뤄낸 이 땅의 연대가 눈물겹다
- 조영석 기자
(진도=뉴스1) 조영석 기자 = 세월이 지날수록 깊어지는 아픔이 있다.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 참사도 그렇다. 304명이 숨지고 5명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채 10년이 지났다.
진도 서해랑길 10코스는 4월 16일의 304명을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확인하는 길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안전한 사회에 살고 있는가'라는 위태로운 질문이 함께 걷는 길이다.
길은 진도 서남단에 위치한 어업 전진기지이자 국가어항인 '서망항'에서 출발한다. 꽃게 파시로 유명한 서망항에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가 우뚝 서있다. 파시가 끝난 서망항의 VTS는 교신이 끊겨버린 그날의 세월호처럼 침묵으로 진도 앞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내가 죽어 네가 산다면"…맘(MOM) 조형물의 뚫린 가슴
길은 서망항 언덕에 세워진 꽃게 조형물을 지나 격장지린의 팽목항으로 이어진다. 가는 길에 진도국민해양안전체험관이 비켜서 있고, 체험관 옆에 높이 12.5m의 노란색 어머니 상이 세워져 있다. 해양안전정원의 '맘(MOM) 조형물, 세월호 기억공간'이다.
맘 조형물은 가슴이 뚫린 채 국화 한 송이를 기도하듯 모아들고 바다건너 세월호 참사 해역을 바라보고 있다. 뚫린 가슴은 시커멓고, 바람이 지나는 시커먼 가슴벽에 세월호 희생자들의 이름이 한 명 한 명 새겨져 있다. 자식을 앞세워 가슴에 묻은 어머니의 비탄에 세월도 흐름을 잊고 함께 서 있다.
'맘 조형물'은 서해랑길 구간에 포함되지 않지만 일부러 발품을 판다면 길손의 먹먹해진 가슴에 세월호의 리본 하나, 노랗게 피어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항구 '팽목항'
해양안전체험관을 지나면 세월호 참사의 또 다른 이름이 된 팽목항이 모습을 드러낸다. 참사 수습 항구로 사용되면서 '세상에서 가장 슬픈 항구'라는 이름을 얻었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이를 영원히 기다리는 항구'가 됐다. 공식명칭인 '진도항'보다 '팽목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팽목항 방파제는 '세월호 기억의 벽'으로 변했다. 방파제는 손바닥만 한 작은 타일 4600여장이 저마다의 그리움과 추모를 담아 벽을 채우고, 방파제 양옆의 노란 깃발들은 바람에 날리며 먼 바다를 향해 손짓하고 있다.
'그날의 기억! 책임! 약속!'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방파제 초입의 세월호 리본 조형물에서부터 방파제 끝자락에 세워진 '기억의 등대'까지 걷다보면 분노와 슬픔과 위로와 희망의 서사가 이뤄낸 이 땅의 연대가 눈물겹다.
◇팽목방조제로 바다는 육지가 됐지만…
진도항(팽목항)을 뒤로 한 발길은 팽목마을을 지나 1.8㎞에 달하는 팽목방조제에 닿는다. 임회면 팽목리와 지산면 마사리 사이의 바다를 막은 팽목방조제로 396㏊의 간척지가 생겨났다. 육지로 변한 바다에서 낙지와 조개 대신 보리와 나락이 자라고, 더 이상 내륙으로 갈 수 없는 바다만 잔파도로 서성인다.
길은 팽목방조제가 끝나는 마사수문에서 죽도선착장을 지나 다순기미 소망탑이 있는 바닷가로 내려선다. '다순기미'는 '따숩다'는 말의 '다순'과 바다가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지명을 나타내는 '기미'의 합성어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다순' 손길들이 쌓아 올린 소망의 돌탑이다. '참사현장 28Km'라는 가늠되지 않는 이정목의 숫자 끝에서 먼 바다가 하늘빛으로 고요하다.
◇ 팽목바람길에 부는 파도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다순기미 소망탑을 지난 발길은 '팽목바람길'로 명명된 조붓한 자드락 숲길로 들어선다. '세월호 기억의 벽'을 만든 동화 작가들이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2018년 주민들과 함께 만든 도보여행길이다.
왼쪽으로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인 조도군도가 물비늘과 함께 펼쳐지는 해안 비탈길이다. 조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154개(유인도 35,무인도 119)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뤄진 군도다. 군도의 한 섬, 맹골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했다. '참사'로 닿을 수 없는 섬 하나가 조도군도에 더해졌다.
잔등너머에서 숲을 나선 길은 오른쪽 마사마을로 내려간 뒤 팽목방조제를 걸으며 보았던 광활한 간척지를 지난다. 들녘엔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고, 듬성듬성 보이는 빈 논은 못자리를 위해 갈아엎어졌다.
서해랑길과 팽목바람길은 동석산 얼굴의 주름이 보일 때쯤 지산양수장 앞에서 동행을 끝내고 제 갈 길을 간다. 팽목바람길은 팽목항을 향해 곧바로 가고, 서해랑길은 왼쪽으로 꺾여 수로를 따라 동석산으로 향한다.
◇ 길에서 만나는 동석산의 절경
동석산은 높이가 219m에 불과하지만, 사람이 그러하듯 산의 품격이 높낮이에 있지 않다는 입증의 서사를 칼바위의 절경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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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암봉능선이 1㎞ 이상 이어지고 산마루만 떼어 놓은 듯한 가파른 절벽은 보는 이에 따라 북한산의 인수봉이나, 설악산의 용아능선, 전북 진안의 마이산을 떠올린다. 산을 오르지 않고, 논틀길에서 마주하는 명산의 정상은 그 자체로 경이로움이다.
정상에서 즐기는 명품 해넘이와 해돋이를 '언젠가는'으로 기약하고, 자꾸만 뒤돌아서려는 발길을 재촉해 봉암저수지로 향한다. 해방둥이 인 봉암저수지는 팽목방조제가 들어서면서 생긴 간척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며 보리를 살찌우고 나락을 살찌워 생명을 키운다.
저수지 길 옆에 철퍼덕 주저앉아 목을 축이는데 둑방에 하얗게 핀 데이지 꽃이 종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힘내라고 살갑게 웃는다.
여행 팁 – 진도 서해랑길 10코스는 서망항- 팽목항- 팽목방조제- 죽도선착장- 다순기미 소망탑- 마사리- 봉암저수지- 가치버스정류장으로 이어지는 15.9㎞의 길이다. 5~6시간 소요되는 난이도 하급이다. 다순기미 소망탑에서 잔등너머의 '팽목바람길'을 제외하면 그늘이 없는 허허벌판길이다. 서망항에 장어탕과 꽃게탕 등을 파는 식당이 서너 군데 있고 팽목항에는 편의점이 있다. 팽목항을 지나면 음료나 식수를 구하기 힘들다.
kanjoy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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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날이 풀리고 산하엔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습니다. 길 따라 강 따라 굽이굽이 얽힌 삶과 역사의 흔적을 헤아리며 걷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이 '서해랑길'을 따라 대한민국 유일의 '민속문화예술 특구'인 진도구간을 걸으며 길에 새겨진 역사, 문화, 풍광, 음식, 마을의 전통 등을 소개하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신들메를 고쳐 매고 함께 떠나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