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유엔참전국⑫] 힘겨운 국방력에도 참전한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

편집자주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유엔 22개국에서 195만7733명이 참전했다. 참전용사들의 용기와 활약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다. 은 유엔평화기념관과 함께 정전협정 70주년을 기념해 한달에 한번 총 21회에 걸친 ‘이달의 유엔참전국’ 연재를 통해 유엔참전국과 참전용사의 활약상을 조명하고 기억하고자 한다.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 군인들의 모습.(유엔평화기념관 제공)

(부산=뉴스1) 강승우 기자 =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제1·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난 뒤 이전까지 표방했던 중립을 1949년에 포기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했다.

이전까지 작은 중립국에 불과했던 양국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며 국방력이 저하된 상태였다. 이에 양국은 미국의 국방력에 의지하게 됐고, 한국전쟁 파병은 현실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유엔과 미국이 참전요청을 했고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양국은 협의를 통해 1950년 7월22일 지원병을 모집하고 통합된 대대를 편성해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룩셈부르크는 총 인구수가 20여만명에 불과했음에도 한국전쟁 참전 의지를 유엔에 강력하게 피력했다. 결국 룩셈부르크 정부는 48명의 참전 병력을 편성해 벨기에 대대에 합류시켰다.

이에 벨기에는 2000여명의 지원자 가운데 700여명을 엄선해 제1벨기에 대대를 창설했고 룩셈부르크 정부는 48명의 참전 병력을 편성해 벨기에 대대 A중대에 합류시킨다.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750여명)는 3개의 소총중대, 1개의 화기중대, 대대본부 및 본부중대 등으로 편성돼 한국의 산악지형과 유사한 곳에서 1개월간의 훈련을 실시하고 황태자로부터 부대기를 수여 받았다.

이후 대대는 1950년 12월18일 앙베르 항에서 영국 수송선 ‘카니마’를 타고 1951년 1월21일 부산항에 상륙했다.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 부대원들이 M46 패튼 전차에 적재할 포탄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유엔평화기념관 제공)

부산에 상륙한 이들은 동래로 이동해 유엔군 수용소에서 6주간 현지 적응훈련과 병참선 경계 임무를 수행하고 정비를 실시한 이후 미 제3사단에 배속돼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여한다.

참전 초기 경북 왜관지구에서 유격전을 실시하고 한강으로 이동한 대대는 전문적인 전술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경기도 금굴산 전투, 강원도 학당리 전투, 김화 잣골 전투 등에서 뛰어난 전투력을 증명했다.

특히 금굴산 전투에서 중공군 공세를 이틀에 걸쳐 저지해 영국군이 철수로를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김화 잣골 전투에선 중공군 제70사단 집중 공격에도 55일 동안 진지를 지켜내며 가장 값진 승전을 이뤄냈다.

참전 기간 동안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총 3598명의 인원을 한국으로 보냈고 보병대대 1개 규모의 병력인원은 600~900명으로 유지됐다.

이들은 여러 전투와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101명이 전사하고 349명이 부상당하는 등 치열한 전투 가운데 자신들의 전투력과 헌신을 입증했다.

경기 동두천시에 있는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 참전 기념비 (동두천시 제공)

제1·2차 세계대전 속에서 집단안보의 소중함을 체득한 벨기에와 룩셈부르크가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한반도 자유 수호를 위해 참전을 결정한 것은 결의와 신념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들의 전투력과 헌신은 미국과 한국 대통령, 미8군사령관 등이 부대 표창 및 무공훈장을 수여함으로써 인정받았다.

정부는 이들의 전공을 기리며 경기 동두천시에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 참전 기념비를 세웠으며, 지난 1월에는 국가보훈처가 이달의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했다.

lordlykang@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