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석레인저가떴다] 눈꽃 만발 윗세오름, 신의 정원 영실기암…와~백록담
한라산 어리목~윗세오름~영실 11.9㎞…대한민국 최고봉 '풍경 선물'
백록담 화구벽 웅장한 자태 탄성…선작지왓 눈부신 설원 '가슴 뭉클'
- 신용석 기자
(서울=뉴스1) 신용석 기자 =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 한라산을 간다. 한라산(漢拏山/1950m)은 '은하수(漢)를 끌어당길(拏) 만큼 높은 산'이라는 이름이다. 예전의 중국에서 동쪽에 신선이 사는 영주산(瀛洲山)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바다에 있는 산', 즉 한라산을 일컬은 것이다. 이 신선의 산에 불로초가 있다고 하여, 2200년 전에 진시황이 서복이라는 신하를 한라산에 보냈고, 그가 돌아간 장소를 서귀포(西歸浦)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한라산과 제주도는 화산이 폭발해서 생긴 땅이다. 바다 밑에서 솟구친 화산재가 쌓여 제주도의 기반이 되었고, 이후 육지의 여러 오름에서 분출된 묽은 용암이 흘러 제주도의 편평한 구릉과 해안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중에 끈적끈적한 용암이 여러 번 분출되어 쌓이면서 한라산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한라산은 우뚝하고 제주도는 편평하다.
한라산에는 크게 다섯 개의 등산코스가 있다. 어리목, 영실, 돈내코, 성판악, 관음사에서 올라간다. 그중에서 정상 백록담을 오르는 성판악과 관음사 코스는 예약이 필수다. 예약에 성공했더라도 날씨 때문에 출입통제되는 날이 많다. 기자가 예약한 날도 대설주의보가 내리는 바람에 한라산 전체가 출입통제되었다. 다행히도 다음날 통제가 풀렸으나, 정상 코스는 예약이 취소되었기 때문에 다른 코스를 택해야 했다. 한라산의 날씨는 하느님만 안다고 한다.
◇ 어리목 입구-사제비동산-윗세오름 5.7㎞ "눈꽃 터널에서 눈가루 샤워하며 올라가 웅장한 백록담 화구벽을 마주하다"
한라산 출입통제 여부는 새벽 5시에 공지된다. 어젯밤 늦게까지 제주시내에 진눈개비가 날려서 조마조마하며 한라산국립공원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오! 모든 구간이 파란색이다. 입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리목-윗세오름-영실 구간은 한라산의 아름다운 고지대 초원과 오름들을 짧은 시간에, 쉬운 걸음으로, 안전하게 즐길 수 있어 ‘가성비가 높은 코스’로 통한다. 더구나 어제 많은 눈이 내렸으니 그토록 바랐던 설경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평일임에도, 어리목으로 가는 버스는 등산객들로 만원이다. 그들의 말투로 짐작해보니 절반은 육지에서 온 사람들, 절반은 제주도 사람들이다. 제주도민끼리의 대화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
어리목주차장에서 바라본 한라산은 어디를 보나 둥글둥글하다. 왼쪽으로 가면 30분쯤 올라서 한라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어승생악(御乘生岳/1169m)이다. 임금에게 바치는 말을 생산하는 곳이라는 지명이다. 윗세오름은 오른쪽으로 간다. 등산로 입구에서 레인저 한 명이 아이젠을 착용하라고 하니 다들 얌전하게 아이젠을 꺼낸다. 그러나 눈이 푸석푸석하고 얼지 않은 상태에서는 하산할 때에 착용하는 것이 좋다.
등산로에 들어서자마자 아름다운 설국이 펼쳐진다. 마침 하늘은 새파랗다. 커다란 나무 밑에서 고개를 꺾어 하늘을 찍으면 무조건 눈꽃 풍경이 근사하게 찍힌다. 포토존 아닌 곳이 없다. 하얀 눈에 덮혀 그 나무가 그 나무 같은 나무들에게 '고로쇠나무, 산딸나무, 섬개벚나무, 개서어나무' 등의 이름표가 달렸고,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자세를 잡고 솜뭉치를 얹은 어린 구상나무도 있다. 올라갈수록 구상나무가 많아진다.
누가 이 코스의 등산로를 쉽다고 했는가? 오르막이 꾸준하게 계속되니 휙휙 속도를 내는 사람들에게 뒤처진다. 등어리에 땀이 흥건해서 겉옷을 벗는다. 털모자를 벗은 사람의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른다. 반팔 티셔츠 차림인 청년도 있다. 어리목에서 사제비동산까지 2.4㎞는 쉽지 않은 오르막이지만, 햇살에 녹아 부서져 내리는 눈가루에 샤워를 하며 가는 즐거운 산행이다.
출발한 지 한 시간이 넘어, 하늘이 확 트이면서 좌우로 소나무숲과 구상나무 숲이 환영해주는 사제비동산(1423m)에 오른다. 우선 사제비 샘물을 한 모금 마신다. 몸이 뜨끈뜨끈하니 시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제비 언덕에 올라 잠깐 눈을 감는다. 세상이 온통 너무 하얘서 눈 뜨기 어렵다.
부드러운 오르막을 조금 더 오르면 만세동산(1606m)이다. 전망대에 올라 주변을 돌아보니 정말 만세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백록담 화구벽은 거인인 설문대할망의 털모자처럼 보이고, 그 아래로 여러 개 오름이 물결치듯 이어져 있는 모습은 막 부풀고 있는 호빵처럼 보인다. 설원에 서 있는 나무들은 온통 새하얀 크리스마스 트리다. 빨간색 옷을 입었거나 모자를 쓴 사람은 모두 산타클로스로 보인다.
만세동산에서 윗세오름까지의 길은 구름 위 산책로다. 가까이 백록담을 바라보면서, 도열한 구상나무들의 인사를 받으며 걷다 보면 어느새 윗세오름에 도착한다. 윗세오름(1700m)이란 ‘위쪽에 있는 세 오름’을 말한다. 윗세붉은오름, 윗세누운오름, 윗세족은오름이다
◇ 윗세오름-영실주차장 6.2㎞ "선작지왓 설원에서 가슴이 뭉클하고, 신들의 거처 영실에서 설문대할망의 전설에 가슴이 뜨끈하고"
이 시간의 대피소 광장은 오찬장이다. 음식의 절반은 컵라면과 김밥이다. 넓은 나무데크에서 삼삼오오 점심을 먹는 사람 풍경이 자연의 일부로 보인다. 살아있는 생물들인 것이다. 여름에 이곳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졸던 때가 있었다. 오늘은 반대다. 따가운 햇살을 쪼이고는 있지만, 한겨울의 싸늘한 공기가 곧 몸을 얼린다. 움직이지 않으면 춥다.
윗세오름에서 백록담 화구벽 밑으로 돌아서 내려가는 돈내코 코스도 풍경이 기가 막히다. 돈 내지 않아도 된다. 그리 가면 웅장한 성벽을 이룬 남벽을 가까이 보고, 산 아래로 서귀포를 비롯한 제주도 남쪽의 풍경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다양한 경관을 대부분 볼 수 있는 남벽분기점까지만(2.1㎞) 다녀오는 것도 좋다. 돈내코까지는 등산로가 길어(9.1㎞) 오후 1시면 무조건 탐방을 금지한다. 1시가 가까이 되자 "화장실 다녀오느라 늦었다는 핑계도 소용없다"는 방송이 두세 번 반복된다.
영실 방향으로 간다.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나무데크를 따라 거의 수평으로 간다. 한라산에서 가장 넓은 고산초원인 선작지왓을 지난다. '서있는(선) 작은 돌맹이(작지)들의 초원(왓)'이라는 뜻인데, 마치 인디언 언어 같다. 여기서 돌맹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초원을 한 꺼풀 벗겨내면 돌맹이 밭일까? 거인인 설문대할망이 백록담 화구벽을 작은 돌맹이로 봤을까?
선작지왓 중간쯤에 있는 윗세족은오름(1701m)은 한라산 최고의 전망대다. 365도를 뺑둘러 시야가 거침없이 터진다. 동쪽으로 백록담 화구벽의 위용이 우뚝하고 그 밑으로 둥그런 산세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산 아래로 미끌어지듯 빠져나간다. 다른 방향에도 고만고만한 오름들이 구불거리며 구릉을 만들어 밑으로 내려간다.
수평적인 라인만 있지 수직적인 요소는 없다. 백록담 화구벽마저 아이스크림의 머리처럼 둥그러워 시각적인 부담은 없다. 이게 한라산 정상 고산초원의 평화스러운 모습이다. 한라산에서 최고의 경관이 어디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신들의 초원 위에 백록담 화구벽이 바라보이는 이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작지왓을 가르는 길에 붉은 깃발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다. 눈이 많이 쌓이거나 안개가 짙을 때 길잡이 구실을 한다. 좀 더 내려가니 구상나무가 많다. 고사목이 많아 안타깝지만, 본래 추운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가 기후변화에 의해 쇠퇴하는 것에 대해 인간이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한라산에 에어컨을 쏘일 수는 없으니 앞으로 어떤 생태계가 다가올지에 대해 예측이 필요하다. 한라산의 땅바닥을 빽빽하게 점령하고서 다른 식물의 성장을 막고 있는 제주조릿대에 대해서는 어서 대책이 나와주었으면 한다.
이제 평탄한 길은 끝나고 기다랗고 가파른 계단이다. 내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서운함이 가득하고 올라서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기대감이 가득하다. 내려서면서 확트인 구릉 위에 올망졸망한 오름들을 바라본다. 노꼬메오름, 물영아리오름, 아끈다랑쉬오름 등 제주도의 오름 이름들은 독특하고 정겹다.
내려서는 계단의 전망대에서 절벽을 이룬 병풍바위와 뾰족뾰족한 오백 장군 바위들을 바라본다. 한라산의 신화가 바위로 탄생한 영실기암이다. 영실(靈室)이라는 이름 자체가 신의 거처라는 뜻이다. 설문대할망의 죽음을 몰랐던 오백 명의 자식들이 돌이 되어 기도하듯 하늘로 솟구쳐 있는 모습, 한라산이 무너지지 않을까 철갑을 두르듯 버팀을 하고 있는 병풍바위다. 그 아래로 넓고 깊게, 기다랗게 푹 꺼져 있는 계곡이 거대한 숲에 묻혀있다. 계곡이 아니라 제주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거대한 분화구다.
기다란 계단의 끝부터 숲길이다. 곧 붉은빛 아름드리 소나무가 쭉쭉 뻗어 '전국 아름다운 숲' 대회에서 상을 받은 명품 숲이 나온다. 이 숲길을 빠져나오면 등산로의 끝 영실휴게소다. 이후 2.5㎞의 아스팔트 길을 30분쯤 걸어 버스가 오는 영실주차장에 도착함으로써 산행을 마친다.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니 양뺨이 새까맣다. 내려 쏜 햇빛과 눈에 반사된 햇빛이 공동작업한 검은색이다.
한라산과 제주도는, 육지에서는 모처럼 가는 특별한 섬이다. 엄연한 해외(海外)다. 자연도 문화도 언어도 다르다. 이국적이다. 그곳에 아름다운 자연과 독특한 문화와 외국어 같은 사투리가 남아있는 것이 고맙다.
아름다운 자연에는 개발의 유혹이 있기 마련이다. 육지의 여러 곳에서 산과 땅을 파헤칠 때, 제주도는 그곳을 세계자연유산, 세계생물권보호지역,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하여 3관왕이라는 자축을 하며 보전을 했다. 한라산에서 케이블카 논쟁을 중지한다는 선언까지 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국립공원 구역 축소를 추진할 때 이곳에서는 공원구역 확장을 추진했다.
그 결과,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고유한 향토문화가 지역경제를 살리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귀양 보내고, 가난했고, 항쟁했던 거친 섬과 산이 이제 최고의 여행지가 되어 세계인들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혼저옵서예(어서 오세요), 놀당갑서(놀다 가세요), 잘갑써양(안녕히 가세요)… 이런 정겨운 말을 듣기 위해 또 가고 싶은 섬! 제주도, 계절마다 다른 산이어서 계절마다 가야 하는 산! 한라산이다.
<지난 1년간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구독해 주시고, 귀중한 댓글을 달아주신 독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새해 더욱 건강하시고 늘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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