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녀' 심청과 '충신' 별주부는 없다…국립창극단 '절창 Ⅲ'
[리뷰] '심청가' '수궁가' 현대적 시각에서 참신하게 풀어
관객 웃기고 울린 이광복·안이호, 두 소리꾼의 호흡 돋보여
- 조재현 기자
(서울=뉴스1) 조재현 기자 = 서해 어딘가. 사나운 바람으로 출렁거리는 뱃머리 위에 심청이 섰다. 눈을 질끈 감더니 이내 바다에 몸을 던진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는데 필요한 쌀 삼백 석의 대가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진짜 볼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상황. 일말의 가능성만 믿고 바다로 뛰어든 심경은 어땠을까.
그 바다 아래. 어두운 낯빛의 별주부가 풀썩 주저앉는다. 토끼 간을 구하러 육지로 가야만 하는 상황을 털어놓자 억장 무너지듯 우는 아내를 간신히 달랜 후였다. 가본 적도 없는 데다,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기약 없는 출장길. 별주부라고 달가울 리 없다. 착잡한 마음에 바다 위를 올려봤더니 웬 낭자가 빠지는 게 아닌가.
심청과 별주부. 저간의 사정을 한바탕 풀어놓은 뒤 둘은 서로의 처지를 가엾이 여긴다. 별주부의 돌봄에 기력을 회복한 심청은 그날 밤 꿈에서 어머니를 만난다.
"이제는 꽃신 신고, 네 인생을 살아라." 어머니의 말에 깨달음을 얻은 심청은 별주부를 찾아가 기막힌 안을 건넨다.
"나를 육지로 데려다 주면 시장에서 토끼를 사다가 간을 구해다 줄 테니 나랑 같이 갑시다."
심청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별주부는 답한다. "콜!"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내하던 심청과 별주부의 180도 달라진 모습이 지난 6~7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펼쳐졌다. 젊은 소리꾼들의 참신한 소리판 '절창 시리즈'의 마지막 '절창 Ⅲ'에서였다.
국립창극단 단원 이광복(40)과 '범 내려온다'로 잘 알려진 밴드 '이날치'의 보컬 안이호(43)는 상상력과 새로운 해석을 더해 맛깔스럽게 엮은 '심청가'와 '수궁가'로 관객을 웃기고 울렸다.
극은 어두컴컴한 밤,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에서 시작한다. 이광복은 차마 말로는 하기 힘들었을 심청의 심경을 조목조목 노래하며 관객의 몰입도를 높였다.
심청이 물에 빠지며 무대가 수궁으로 변하자 안이호가 나와 몹쓸 병에 걸린 용왕과 맥을 짚으며 한의학과 관련된 갖가지 어려운 내용을 나열하는 도사를 익살스럽게 선보였다.
심청이 물에 빠지기 전 선원들이 고사를 지내는 대목에선 국가무형문화재 남해안별신굿 이수자인 황민왕의 구슬픈 구음 가락과 고수·타악 연주자 이준형의 장단이 더해진다. 이에 심청의 비통함은 더욱 부각됐다.
사운드 아티스트 조은희가 빚어낸 파도와 방울 소리는 심청이 물에 빠지는 대목에서 긴장감을 높이고, 감각적인 전자음은 판소리식 유머와 재담을 돋보이게 했다.
애절했고, 능청스러웠던 두 젊은 소리꾼의 독창 무대가 끝나자 작품의 하이라이트가 열렸다.
앞서 서술한 '별주부의 집-심청의 꿈' 장면이었다. 심청을 등에 업고 육지로 향하던 별주부는 그제야 세상 경치를 둘러보며 깨닫는다. "그동안 내가 바다에 사는 줄 알았는데, 우물에 살았구나." 뭍에 당도한 별주부는 토끼 간 대신 자유를 찾아 다시 바다로 떠난다.
별주부의 도움으로 인간 세상에 돌아온 심청은 어떨까. 황후가 될 기회를 얻었으나 이를 마다하고 황제에게 맹인 잔치를 열어달라고 간청한다. 심청은 잔치에 나타난 아버지를 보고 '왜 아직도 눈을 못 뜨셨느냐'며 울부짖는다. 이후 아버지가 눈을 떴지만, 심청은 아버지를 와락 껴안거나 하지 않았다. 별주부가 바다로 돌아간 것처럼 그저 말없이 궁을 떠났다.
현대적인 시각으로 두 작품을 엮고 풀어낸 방식은 꽤 훌륭했다.
작품은 아버지를 위해 몸을 던진 심청과 용왕을 위해 뭍으로 간 별주부에게 씌워진 '효'(孝)와 '충'(忠)의 가치관을 걷어낸다. '희생의 아이콘' 심청과 별주부가 자신을 위한 삶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며 관객 역시 어떤 방향성을 갖고 살아가야 할지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 같았으면 심 봉사는 아동방임죄, 선원들은 자살방조죄"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대목에선 시대와 세대를 거쳐 변주되고 재해석되는 고전 만의 가치가 빛난다.
아주 뛰어난 소리를 뜻하는 '절창'(絶唱) 시리즈답게 두 소리꾼의 재능도 만끽할 수 있다. 100분간 이어진 구성진 소리판에 관객 역시 '얼씨구' '잘한다' 등의 추임새로 두 소리꾼과 호흡했다. 이런 호응 덕에 2021년과 2022년 각각 초연한 절창Ⅰ, Ⅱ도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다만, 지역 방언과 한자로 인해 일부 이해하기 힘든 대목도 있었다. 절창 Ⅲ의 경우 무대 옆 스크린에서 한자 뜻풀이가 이뤄졌으나Ⅰ, Ⅱ에선 이를 찾아볼 수 없었다. 더 많은 동시대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 생각해볼 점이다.
cho84@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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