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가 깨지는 순간 드러나는 '휴머니즘', 작품이 되다
박종규, 첫 학고재 개인전 '시대의 유령과 유령의 시대'…4월29일까지
"노이즈 완전 사라진다면 인간도 완전무결하단 것, 휴머니즘 살아있다"
- 김일창 기자
(서울=뉴스1) 김일창 기자 = '노이즈'(noise, 잡음·소음)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단언컨대 컴퓨터에서 발생하는 노이즈를 반길 사람은 없다. 열심히 작업한 중요 문서에, 신나게 즐기는 게임 중간에 오류라도 발생하면 온몸이 굳고 막막하고 짜증이 난다. 일상의 소음이야 참을 수 있어도 컴퓨터상에서의 '노이즈'를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이유다.
그러나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컴퓨터가 '실수'를 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인공지능(AI)이 거침없이 발달하는 시대, 그래도 휴머니즘이 존재함을 노이즈를 통해 확인하는 식으로 말이다. 실제 그렇게 생각하는 작가가 있다. '노이즈'를 작품화한다. 그의 이름은 박종규(57). 박종규의 학고재 첫 전시가 오는 4월29일까지 이어진다.
이번 전시에서 박종규는 최근에 제작한 회화와 조각, 영상 등 총 40점을 선보인다. 대구 출신으로 주로 고향에서 활동했던 점을 고려하면 대규모 개인전이다. 지난해 5월 학고재는 박종규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다시' 주목받고 있음, 이것이 아니라면 '이제서야' 주목받음의 방증이다.
박종규는 추상회화 작가다. 모티브는 노이즈다. 모두가 싫어하는 노이즈에서 휴머니즘을 발견했다. 학고재 신관 1층에 걸린 작품 '수직적 시간'은 노이즈의 미화다. 지난 2022년 2월 대구시 중구 동성로에 위치한 한 빌딩 전광판에 그의 영상 작품 '수직적 시간'이 상영됐다. 어느날, 전광판을 작동시키는 컴퓨터에 노이즈가 발생하자 '모래폭풍' 장면이 분홍색으로 망가져 보였다. 일반인이었다면 고장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박종규는 바람에 휘날리는 벚꽃과 진달래를 봤다. 그리곤 이를 캔버스에 옮겼다.
작품을 마주해도 노이즈란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작품의 제작 배경을 몰라도 흩날리는 것들을 보면서 아련한 또는 그 반대로 힘있는 무언가가 스쳐 지나간다.
신관 지하 2층에서 만나는 '수직적 시간' 연작에서는 노이즈에서 흔히 연상되는 '무질서'는 없다. 질서정연하다. 질서정연함에서 문득 '노이즈란 무엇인가' 물음을 던진다. '듣기 싫은 잡소리에 불과한 것인가, 평소 우리가 싫어하고 하찮게 여기는 것들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확대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르게 다가올까'라고. 박종규가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던지는 물음표이다.
그는 반듯한 사각형 캔버스에 그려지는 정통 회화에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학고재 본관에 걸린 '수직적 시간'은 새로운 비정형 회화 연작이다. 프랑스 유학 시절 클로드 비알라로부터 사사한 박종규는 스승처럼 회화의 본질이 평면성에 있다는 주장에 문제 의식을 갖고 있다. 사각에서 깎여지고 돌출돼 어딘가 이상한 캔버스는 그의 회화에 대한 인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박종규는 기술이 극한까지 발전했을 때 인간은 로봇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컴퓨터에 노이즈가 발생한다는 사실 속에 담겨있는 행간의 의미가 중요하다"며 "아직 휴머니즘이 살아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컴퓨터도 AI도 그 뒤에는 인간이 있다. 노이즈의 발생은 인간이 완전 무결하지 않다는 방증이다. 노이즈가 완전히 사라진다면 인간도 완전무결하단 논리다. 이런 논리로 박종규는 오늘도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관한 철학적 사유로써 추상회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icki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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