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역사 크루즈] 쿠르스크 악몽의 전차전①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서울=뉴스1)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다 보면 2차 세계 대전 당시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투 양상이 데자뷔처럼 오버랩된다. 격전지, 진격 방향, 전투 방식이 신기할 정도로 되풀이된다. 이 전쟁을 보면서 역사라는 학문은 인간이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할 뿐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회의가 반복해서 필자를 괴롭히고 있다.

그런데 과거 격렬했던 전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곳이 하나 있다. 쿠르스크시이다. 쿠르스크 전투는 전쟁사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상 최대의 전차전이라는 명성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이는 낭만적인 시각이다. 평원의 전차전은 이 전투의 일부분일 뿐이다. 독-소군 200만 명이 넘는 병력이 사투를 벌였던 독소 전쟁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처절했던 전장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100만 명의 독일군을 가둬놓고 말려 죽이는 전투였다면 쿠르스크 전투는 하늘과 땅이 폭탄과 포탄에 개방된 평원에서 강철과 몸이 부딪혔던 전투였다.

◇ 소련의 섬멸전과 만슈타인의 기동

1942년 독일군 100만 명이 스탈린그라드에 갇히면서 독소전쟁은 역전의 계기를 맞는다. 스탈린은 이 기회를 성급하게 이용했다. 자기 국민을 갈아 넣고 있는 전쟁이었으니 서두르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이번에는 병사들을 갈아 넣었다.

독일군은 소련군을 이반이라 불렀다. 톨스토이의 소설 바보 이반처럼 그 앞에 '바보'라는 뜻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좋은 뜻은 아니었을 거다. 참고로 영국군은 독일군을 '훈족'이라 칭했다.

1941년 독소전쟁 개전 때만 해도 이반은 진짜 이반이었다. 철모 같은 필수장비도 갖추지 못한 병사도 많았다. 용감하고 희생적이기는 했지만, 전술 능력은 어이가 없었다. 병력과 화력, 지형이 절대 불리한 상황에서도 독일 병사들은 쉽게 승리를 거두곤 했다. 이런 승리는 자랑스러웠고, 자신감을 더 키워주었다.

하지만 42년 후반기엔 상황이 역전된다. 병사의 개인장비는 소련군이 더 우수했다. 당시 전선에 있었던 독일군의 수기를 보면 이제 소련군은 멍청한 이반이 아니라 교활하고 집요한 이반이었다.

스탈린은 이런 역전 상황에 고무되었고 전쟁을 성급하게 끝내고자 했다. 하지만 병사들이 강해졌다고 해서 군대가 강해지는 건 아니다. 군대는 조직이고 조직의 힘은 경영 능력에서 나온다. 경영 능력에서 소련군은 아직 많이 미흡했다. 무서운 독재자, 상명하복의 분위기도 큰 역할을 했다. 42년에 스탈린은 대공세를 명령한다. 승리는 했지만 희생이 컸고, 역습을 받아 더 큰 희생을 냈다. 그래도 스탈린의 밀어붙이기는 그칠 줄 몰랐다.

우크라이나에도 대폭풍이 밀어닥친다. 소련군은 현재의 북쪽 벨라루스에서 동쪽 아조프해까지 전 전선에서 공세를 실시했다. 벨라루스 쪽 공세는 하르키우와 키이우를, 동쪽에서는 도네츠 지방을 거쳐 드네프르강 동안을 장악하고, 로스토프에서 이번에도 장대한 격전이 벌어진 마리우풀까지 진격해서 카프카즈 쪽으로 들어간 독일 B집단군을 고립시킨다는 야심 찬 공세였다.

그러나 오랜 전투로 소련군은 지쳐 있었고, 장비는 다 망가져 있었다. 식량조차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다. 이럴 때 상대는 전술과 작전의 천재 만슈타인이었다. 그는 도네츠 지역에서 과감하게 후퇴해서 소련군을 끌어들인 다음, 사전에 지목해 둔 반격지점에서 소련군의 측면을 습격하는 기동방어 전술을 선보였다.

종심방어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기동방어는 전쟁사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었던, 그러나 명장과 잘 훈련된 군대만 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이때 만슈타인의 기동방어는 전설적인 수준으로 독일군이 너무나 먼 거리를 빠르고 희한하게 이동하는 바람에 소련군 지휘부는 독일군이 준비된 방어 거점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지리멸렬하게 후퇴하고 있다고 착각했을 정도였다.

이미 탈진해 있던 소련군은 만슈타인의 강력한 카운터 펀치에 녹다운이 되었다. 창은 부러지고, 급속하게 후퇴했다. 만슈타인은 단숨에 키이우와 하르키우를 탈환했다. 만슈타인의 최종 목적지는 온 땅이 진창이 되는 라스푸티차가 오기 전에 쿠르스쿠와 보로네슈를 잇는 라인까지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라인을 확보하면 모스크바까지 훤히 뚫린 평원이 열린다. 사실 독일군은 다시 모스크바로 진격할 마음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독일군의 보급, 군수 생산능력이 따라 주지 않았다. 만슈타인의 목적, 아니 독일군의 오래된 전략적 목적은 모스크바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확보였다. 근대 독일군을 만든 몰트게는 "러시아를 침공하더라도 우리의 목적은 우크라이나이다, 행여나 과도한 욕심을 부려서 모스크바를 노려서는 안 된다"고 이미 경고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를 무시했고, 그 결과로 이런 위기를 초래했다. 하지만 소련이 우크라이나를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모스크바를 위협할 수는 있어야 했다. 합리적인 독일의 전략가들은 현재의 벨라루스에서 쿠르스크, 우크라이나를 잇는 선이 독일의 최대 팽창한계이며, 합리적이고 최대 가성비를 보장하는 영역이라고 판단했다. 이때쯤이면 히틀러도 그렇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 여름을 기다린다

만슈타인의 역습은 소련의 천재에 의해 막혔다. 전선이 위급하자 스탈린은 불패의 명장 주코프를 소환했다. 주코프는 가용한 병력 전부를 동원해 쿠르스크를 틀어막았다. 쿠르스크는 독일군 전선에 이 부분만 쑥 들어온 돌출부 형태가 되었고, 진창으로 변한 땅 덕에 양군은 강제 휴전기에 들어갔다.

강제 휴전기 동안 양군은 다가올 결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전세는 이미 역전되었다. 독일군의 성공은 오직 기습과 여세로만 달성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승리는 전술적 승리뿐이었고, 전술적 승리가 전략적 승리로 연결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소련군은 성장하고 있었지만, 독일군의 전술적 능력까지 올라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러-우 전쟁을 보면 현재까지도 그 수준에는 오지 못했다. 그래도 장기전의 승부는 단언할 수 없었다.

미국은 미친 듯이 소련에 군수자원을 지원해 주고 있었다. 소련의 T-34 전차는 이미 성능 면에서 독일 전차를 이겼다. 독일도 T-34 쇼크로 티거와 판터라는 밀리터리 마니아들의 우상을 제작하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T-34를 압살하는 성능이 아니었을뿐더러, 생산능력에서 심각한 격차가 있었다. 소련의 전차 생산량은 월 2000대였고, 독일의 생산량은 200대였다. 티거는 겨우 25대가 최선이었다.

독일은 양의 열세를 질로 커버한다는 구상이었지만, 질도 양이 받쳐줘야 한다. 게다가 독일 기갑부대의 독보적 능력이 기동인데, 티거는 너무 무겁고, 판터는 아직 시제품이어서 잦은 고장으로 모두 기동력을 희생 또는 제약하고 있었다. 차라리 독일 4호 전차에 75mm 포를 장착한 개량형을 양산하는 편이 나았다는 주장도 있다.

만슈타인은 독일이 승리하는 길은 현재의 영토를 지키면서 종심-기동방어로 공격해 들어오는 적을 섬멸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독일군의 독보적 능력을 극대화하고, 부족한 생산력을 커버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히틀러를 설득할 수가 없었다. 히틀러는 정치가이자 독재자였다. 방어적인 전략은 자신의 카리스마를 퇴색시킨다. 동맹국들의 반발도 문제였다. 스탈린그라드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동유럽군과 이탈리아군이 붕괴했다. 그들은 히틀러의 몰락을 감지했고, 병력차출에 협조적이지 않게 되었다.

여기에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하면서 무솔리니가 몰락하기 시작했고, 연합군의 서유럽 침공(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시간문제였다. 히틀러는 더 이상의 양보는 없다고 못 박았다. 선제공격으로 적을 섬멸한다. 그것이 영광의 길이었고, 자랑스러운 승리였다.

하지만 이건 독재자의 아집일 뿐이다. 이미 독일 베를린과 주요 도시는 밤낮으로 폭격을 받고 있었다. 국민들도 민간인의 희생은 고사하고 고통 없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린 지 오래였다. "한 치의 땅도 빼앗길 수 없다"는 구호는 전쟁 전에나 통하던 것이다. 모든 국민이 전선에 있었고, 국민들은 현실적이 되어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히틀러에 대한 환상의 포기라는 부분도 있다. 어쩌면 이 부분 때문에 모든 독재자는 '영광스러운 승리'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것 같다.

히틀러 입장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태도는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었다. 다행이라면 상대편의 독재자도 결코 만만치 않은 폭군이었다는 것이다. 쿠르스크를 둘러싼 양측의 대치는 이상한 방향으로 과열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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