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봉분 규모 갈수록 축소…초기·후기 왕릉은 어떻게 다를까

'조선왕릉 봉분 및 능침지반 연구' 보고서 발간
후기 들어 배수 체계 발달…"입지 없는 왕 무덤은 관리도 소홀"

경기 구리시 동구릉 내 건원릉. (뉴스1 DB) 2022.4.6/뉴스1 ⓒ News1 구윤성 기자

(서울=뉴스1) 조재현 기자 = 조선시대 왕릉의 봉분 규모가 후대로 갈수록 작아지고 배수 체계는 점점 발달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21일 발간한 '조선왕릉 봉분 및 능침지반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 초기 왕릉은 지하 현궁(국왕과 왕후의 관을 묻는 구덩이)을 대형 석재로 넓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봉분 지름도 32~35자(약 9.86m~10.78m)에 달했다.

하지만 15세기 후반 이후 현궁을 대형 석재 대신 회격(석회나 가는 모래, 황토 등으로 만든 관)으로 조성하면서 점차 봉분 지름이 줄었다.

17세기 후반부터는 합장릉을 제외한 단릉, 쌍릉, 삼연릉의 경우 봉분 좌우지름과 봉분 사이 간격을 조절해 봉분 지름이 25자(약 7.7m)까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 후기 왕릉 봉분 지름의 변화. (궁능유적본부 제공)

주위 석물에 따른 봉분 지름의 변화도 확인됐다.

봉분 하단을 병풍처럼 둘러주는 사대석을 갖춘 왕릉은 비교적 조성 당시 봉분 제도에 부합하나 봉분 높이가 높아졌다. 난간석만 있는 경우 봉분 지름은 넓어지고 높이는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능침지반도 초기에는 봉분 사방으로 미세한 경사면을 조성하고 곡장(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주변으로 배수로·배수구·배수홈 등을 설치했다. 다만, 후기로 갈수록 경사면을 적극적으로 조성해 점점 발달한 배수 체계를 만들었다는 사실도 처음 밝혀냈다.

궁능유적본부 관계자는 "후대에 추존되거나 왕실에서 입지를 다지지 못한 왕과 왕후의 무덤은 조선시대에서부터 관리가 소홀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궁능유적본부는 지난해 3~11월 조선왕릉 40곳의 봉분제도와 능침지반의 원형을 밝히기 위해 산릉의궤, 조선왕조실록 등 고문헌 분석과 현장조사를 했다.

궁능유적본부는 봉분의 기준제도와 능침지반의 검측 수치 및 정비 방향도 보고서에 담았다. 보고서는 문화재청 누리집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조선왕릉 봉분 및 능침지반 연구' 보고서 표지. (궁능유적본부 제공)

cho84@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