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으로 시민 지킨 공무원·과학자 '프랜시스 켈시'[아무Tech]

탈리도마이드, 전세계서 기형아 유발했지만 미국에서는 적어
외압에 맞서 약품 승인 보류…안전한 의약품 정책으로 이어져

프랜시스 켈시 박사가 1962년 8월 7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공로상을 받는 모습. (Abbie Rowe. White House Photographs. John F. Kennedy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 Boston) 2024.12.06 /뉴스1

(서울=뉴스1) 김승준 기자 = 탈리도마이드는 의약품 역사에 비극으로 남았다. 임산부 입덧 완화 효과가 인정받아 약 50개 국가에서 판매됐다.

임신 초기에 이 약물을 복용한 임산부에게서는 팔, 다리가 짧거나 결손 된 아기가 태어났다. 전 세계적으로 1만~2만 명의 피해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탈리도마이드는 두 가지 구조가 있는데 한 구조는 안전하고 다른 구조는 태아에 독성이 있다. 안전한 구조의 탈리도마이드만 먹어도 체내에서 위험한 형태로 변환돼 문제를 일으킨다.

미국에서는 이런 피해가 적었다. 제약사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은 공무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약리학과 의학 전문가인 프랜시스 켈시 박사는 미국 식품의약청(FDA)에서 의약품 승인 심사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1960년 FDA에 채용된 첫 해 그는 탈리도마이드 심사 업무를 맡으며 승인을 보류했다. 당시 탈리도마이드는 20개국 이상에서 승인받았지만 켈시 박사는 과학적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당시 FDA 규정상 승인 보류는 1회에 60일이 가능했다. 켈시 박사는 60일마다 제약사에 동물 실험 결과를 비롯한 추가 정보를 요구하며 승인을 끌었다.

해당 제약사는 켈시의 상사에 불만을 제기하고 다른 과학자들을 동원해 켈시 박사를 압박했다. 제약 사는 승인 이전에 샘플이라며 미국 의사들에게 탈리도마이드를 배포했고 이때 풀린 약품으로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탈리도마이드를 둘러싼 싸움은 1961년 11월 유럽에서 부작용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1년가량 이어졌다. 제약사는 1962년에서야 승인 요청 시도를 멈췄다.

외압에도 불구하고 공무원으로서 과학자로서 원칙을 지킨 프랜시스 켈시 박사의의 영웅적 행보는 탈리도마이드 피해를 줄일 뿐 아니라 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켈리 박사의 노력이 알려진 후 미국 정부는 제약사에게 안전성, 효과를 증명하고 부작용도 공개하라는 규제를 만들었다. 이 규제는 현대의 안전한 의약품의 초석이 됐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연방 공무원 최고 영예인 대통령 공로상을 수여했다.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뛰어난 능력과 굳건한 신념으로 미국 시민의 건강 보호에 탁월한 공헌을 했다"고 극찬했다.

켈시 박사는는 2005년까지 공직자로 활동하다가 2015년 10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seungjun241@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