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유산과 이재용의 '통큰 환원'…희귀질환 아이 살린다
유산 3천억, 소아암·희귀질환 지원사업으로 이어져
전국 160개 의료기관 의료진 1071명, 힘 모아 치료 동참
- 신건웅 기자
(서울=뉴스1) 신건웅 기자 = 정우(가명, 5세)는 태어나서부터 이상하게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밤새 부채질을 해도 마르지 않았고, 생후 8개월 무렵부터는 약도 통하지 않는 설사가 잦아졌다. 엉덩이 발진도 심각해졌다. 10만 명 중 1명 있을까 말까 하다는 '당원병'이었다. 희귀난치성 유전질환으로, 정우는 과자나 아이스크림 대신 하루에 12번씩 전분을 먹어야 했고 매일 수십 번 채혈했다. 팔과 발은 시퍼렇게 멍이 들기를 반복하던 정우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것이 소아암·희귀질환사업단이다. 정우가 치료를 마치고 친구들 곁으로 돌아가도록 돕고 있다.
정우가 치료를 무사히 받을 수 있는 것은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유산 덕이다.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회장과 유족들이 이건희 선대회장의 뜻을 계승해 소아암·희귀질환 아이들 지원에 나섰다. 이른바 'KH 유산'이 만든 변화다.
서울대병원은 8일 '함께 희망을 열다, 미래를 열다'를 주제로 '이건희 소아암·희귀질환 지원사업 심포지엄'을 열었다.
앞서 이재용 회장과 유족들은 이건희 선대회장 별세 후인 지난 2021년 천문학적 규모의 사회환원에 나섰다. 12조원이 넘는 상속세를 마련하기 위해 상속 재산의 상당 부분을 매각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유산의 약 60%를 기부하기로 했다.
생전 이건희 선대회장이 지켜온 △국가경제 기여 △인간 존중 △기부문화 확산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계승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한국 미술계 발전을 위해 이건희 회장이 평생 모은 문화재·미술품 2만3000여점을 국가기관 등에 기증했으며, 감염병 극복 지원과 소아암·희귀질환 지원 등 의료공헌에도 1조원을 기부했다.
이중 3000억원을 소아암·희귀질환에 걸려 고통을 겪으면서도 비싼 치료비 때문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전국의 어린이 환자들을 위해 쓰기로 했다.
평소 '어린이는 미래의 희망'이라고 강조한 이건희 선대회장은 취임 초기였던 1989년 삼성복지재단을 설립해 삼성어린이집을 운영하며 '어린이 사랑'을 실천했다.
특히 "5살, 6살 어린이들을 맡는데 (가구 등의) 모서리가 각이 지면 안된다", "아이들 하루 급식의 칼로리가 얼마나 되느냐"는 등 어린이집 건립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1990년 1월 '1호 어린이집' 개관 소식을 전해들은 뒤에는 "진작에 하라니까 말이야"라고 말하며 크게 기뻐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들도 이건희 선대회장의 어린이 사랑을 계승해 10년간 소아암·희귀질환 어린이들 가운데 가정형편이 어려운 환아를 대상으로 유전자 검사 치료, 항암 치료, 희귀질환 신약 치료 등을 위한 비용을 지원한다. 소아암 환아 1만2000여명, 희귀질환 환아 5000여명 등 총 1만7000여명이 도움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유족들의 기부금으로 2021년 8월 발족한 '소아암·희귀질환 지원사업단'은 올해 6월부터 전국의 소아청소년 백혈병 환자를 대상으로 유전체 검사를 무상 지원하는 정밀의료를 시작했다.
현재까지 분야별 소아암 48건, 소아희귀질환 19건, 공동연구 109건 총 176건의 과제를 공모·선정했다. 일부 지역에 한정하지 않고 소아를 진료하는 전국 160개의 의료기관과 1071명의 의료진이 동참하고 있다. 앞으로 더 확대될 전망이다.
전체 진단건수는 소아암 1089건, 소아희귀질환 1746건, 공동연구 1149건 등 총 3984건에 달한다. 또 소아암 14건, 소아희귀질환 627건, 공동연구 1695건 총 2336건의 치료가 진행됐다. 특히 공동 데이터베이스 기반 치료 플랫폼을 통해 소아희귀질환 857건, 공동연구 5336건 총 6193건의 코호트가 등록됐다. 표준화된 치료법을 정립해 전국 환자 모두 동일한 의료 혜택을 얻을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할 계획이다.
'KH 유산'이 한국의 소아암·희귀질환 환아의 고통을 덜고, 치료를 돕고 있는 셈이다. 미술은 물론 감염병 분야 역시 한국 사회를 한 단계 더 나아가게 했다는 평이다.
최영무 삼성사회공헌업무총괄사장은 "모든 어린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하도록 보살피는 일은 우리의 사명이라는 것이 고 이건희 회장의 유지"라며 "삼성의 모든 임직원들도 소아암 희귀질환 극복사업이 반드시 성공하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하겠다"고 말했다.
김한석 소아암·희귀질환지원사업단장은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사업이 전국의 연구자와 환자에게 큰 희망이 되고 있다"며 "선순환 구조를 마련해 궁극적으로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의 길이 열리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keo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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