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은 안내견 덕에 눈을 떴고…그걸 보며 사회도 눈을 떴다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 의지로 안내견학교 설립…30주년 맞아
"국민 의식 개선돼야 진정한 복지사회…수십년 지나 '옳았다' 인정받을 것"

예비 안내견 모습. (삼성전자 제공) /뉴스1

(서울·용인=뉴스1) 신건웅 강태우 기자 = "삼성이 개를 길러 장애인들의 복지를 개선하거나 사람들의 심성을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이런 노력이 사회 전체로 퍼져나감으로써 우리 국민 전체의 의식이 한 수준 높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

30년 전인 1993년 6월 '신경영'을 선언한 이건희 회장은 같은 해 9월 '삼성화재 안내견학교'를 설립했다.

단일 기업이 운영하는 세계 최초이자 유일의 안내견학교지만, 당시에는 기대보다 우려가 컸고 주변 시선도 곱지 않았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물론 반려동물 문화도 희미했던 시절이었던 만큼 시각장애인을 위한 개를 키우는 데 그 많은 돈을 쓸 필요가 있느냐는 얘기였다.

발행되지 않은 이건희 회장의 에세이집 '작은 것들과의 대화'에는 당시 외면받던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이 처음으로 개를 기른다고 알려졌을 때 일부에서는 사람도 못 먹고 사는 판에 개가 다 무어야 하는 공공연한 비난의 소리를 내기도 했다"며 "차라리 직접 가난한 사람들이나 복지 단체에 기부를 하라는 것"이라고 전했다.

그럼에도 이건희 회장이 안내견 사업을 밀고 나간 것은 한국 사회가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 필요하다는 철학과 혜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은 "사회 복지를 완성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며 문화적 마인드"라며 "장애인복지재단이 많이 설립돼 편의를 도모한다고 해도 정작 장애인들이 거리에 나섰을 때 그들을 대하는 일반인들의 눈이 차갑다면 그런 사회를 두고 복지 사회라고 부를 수 없다"고 진단했다.

이에 "(인식과 관습을 바꾸는) 문화적 업그레이드야말로 사회 복지의 핵심이고, 그것이 기업이 사회에 되돌려줄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재투자"라고 강조했다.

이건희 회장은 "비록 지금은 현실도 모르는 이상주의자라거나, 바보라는 비난을 듣고 있지만 십 년이나 이십 년이 지난 다음에 우리가 옳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게 될 것이다"며 "안내견 사업이 우리 사회의 복지 마인드를 한 수준 높이는 데 기여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봤다.

이런 신념과 뚝심 덕에 삼성화재 안내견학교는 1994년 첫 번째 안내견 '바다' 이래 매년 12~15마리를 시각장애인에 분양하고 있다. 지금까지 총 280마리의 안내견을 분양했고, 현재 76마리가 활동 중이다.

지난 30년간 안내견 양성을 위해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의 안내견 훈련사가 예비 안내견과 함께 걸어온 길만 약 81만㎞에 달한다. 이는 지구에서 달까지 한 번 왕복(약 76만㎞)하고도 다시 지구 한 바퀴(둘레 4만㎞)를 더 돈 것보다 긴 거리다.

이건희 회장은 "잔잔한 연못에 작은 돌멩이 하나를 던지는 심정으로, 우리는 안내견들을 세상에 내보내고 있다"며 "세상의 두텁고 완강한 고집과 편견 때문에 안내견 '슬기'나 '대부'나 '태양'이가 더 이상 풀이 죽지 않아도 되는 그날까지, 계속 내보낼 것이다"고 남기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의 노력 덕분에 1996년에는 초등학교 3학년 읽기 교과서에 안내견 설명 내용이 실렸고 1998년에는 안내견의 편의시설 접근권을 보장하는 개정 장애인복지법이 국회를 통과하기도 했다.

세계안내견협회(IGDF)도 정관을 변경해 1999년 삼성화재 안내견학교를 공식 안내견 양성기관으로 인증하고 협회 정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삼성화재 안내견학교는 이제 일본과 대만 등지에서 훈련법을 배우기 위해 찾아올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다. 2008년 대만 핑둥과학기술대학을 시작으로 일본 간사이맹도견협회, 홍콩맹도견협회 등에서 삼성화재 안내견학교를 잇달아 방문해 안내견 양성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했다.

윌리엄 손튼 세계안내견협회 회장은 이날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30주년 기념식에 감사패를 전달하고 "삼성은 지난 30년간 진정성 있는 노력으로 안내견을 훈련시켜왔다"며 "삼성화재 안내견학교가 세계적인 기관으로 성장한 것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keo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