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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도 승려가 있다? 북한 명산 묘향산과 보현사

[북한은 처음이지] 지도와 함께 보는 북한 '핵잼' 가이드북
제1부: 핵심만 짚고 가는 북한 9도②문인들의 고향 평안북도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2019-12-26 08:00 송고
평안북도 지도(라이스메이커 제공). © 뉴스1
평안북도 지도(라이스메이커 제공). © 뉴스1

▼ 면적: 약 1만 2600㎢
▼ 인구: 약 273만 명
▼ 행정구역: 3개 시, 22개 군
▼ 도청 소재지: 신의주시    

평안북도는 한반도 북서지방의 북부, 평안남도 북쪽에 있다. 1896년 행정구역 개편 때 평안도가 나뉘면서 평안남도와 갈라져 평안북도가 되었다.
동쪽에는 자강도, 서쪽에는 황해가 있고, 서북쪽으로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닿아 있다. 1949년 이전에는 현재 자강도에 해당하는 지역도 평안북도에 속해 있었다.    

일본이 1906년 완공한 경의선 등 일찍이 도로망이 발달했고, 압록강 하구에 있는 수풍발전소로 인해 전력도 충분히 공급되는 만큼 공업이 발달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신의주에서 다사도에 이르는 압록강 하류지역을 중심으로 공업이 발달해 있다. 북한의 핵실험 거점이었던 녕변군도 이곳에 위치한다.    
평안북도는 이름난 문인들이 많이 배출된 지역이다.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김소월 시인, 김억 시인, 춘원 이광수와 소설가 계용묵도 이 지역 출신이다.    

◇ 한반도 북쪽을 대표하는 명산, 묘향산    

1909 높이의 묘향산은 평안북도 녕변군, 희천군과 평안남도 덕천군에 걸쳐 있다. 예로부터 ‘동쪽은 금강, 서쪽은 구월, 남쪽은 지리, 북쪽은 묘향’이라는 말로 한반도의 명산을 꼽았는데, 그만큼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아름다우면서도 웅장하다고 하여 ‘수이장(秀而壯)’이라고 불렸다.    

묘향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산에 향복이나 동청 등 향기로운 나무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조상들은 묘향산을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기도 했다. 

묘향산은 단군신화와도 관련이 많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 따르면, 옛날 하늘을 다스리던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자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왔다는 대목이 있다.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에 따르면 이때의 태백산이 바로 지금의 묘향산이다. 단군신화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단군이 하강했다는 신시가 있으며, 단군이 한동안 살았다고 하는 단군굴도 있다.       

보현사(라이스메이커 제공). © 뉴스1
보현사(라이스메이커 제공). © 뉴스1

◇ 북한 불교의 본산 보현사    

묘향산에는 10세기에 창건된 사찰인 보현사가 특히 유명하다. 종교가 거의 말살된 상태인데도, 이곳에는 이례적으로 승려가 상주하면서 진짜 남한의 사찰처럼 운영되고 있다.     

이 때문에 흔히 보현사는 북한 불교의 본산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곳의 승려들은 진짜 승려가 아니다. 그보다는 승려 복장을 하고 이 보현사라는 문화재를 운영하는 관리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인근에 만폭동 계곡, 문수동 계곡, 천태동 계곡, 칠성동 계곡 등 자연 절경도 빼어나 지금도 북한 지도층과 상류층의 휴양지로 이용되고 있다. 김일성 일가의 별장도 물론 존재한다.     

◇ 국가의 명운이 뒤바뀐 계기, 위화도 회군    

위화도는 신의주시 상단리와 하단리에 위치한 섬이다. 1388년인 고려 말기, 요동 정벌에 나선 이성계가 이곳에서 군사를 돌린 일화가 유명하다. 이 사건을 ‘위화도회군’이다.    

우왕 14년, 명나라는 고려왕조에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해왔다. 철령 이북이 원래 원나라에 속했던 것이니 모두 요동에 포함시켜서 명나라의 땅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곳은 현재 강원도 원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고려의 명장 최영은 당장 명나라를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구 토벌로 이름 높았던 또 다른 명장 이성계는 이에 반대했지만, 우왕은 이성계에게 요동 정벌을 명령했다.    

1388년 5월 7일,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도착했다. 장맛비에 물이 불어나 수백 명이 익사하는 등 상황이 좋지 않자 왕에게 회군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5월 22일, 결국 이성계는 왕명을 거역하고 군사를 돌렸다. 고려의 수도 개경은 열흘 만에 함락되었고, 이성계는 권력을 장악했다. 고려 멸망과 조선 왕조 개국의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acene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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