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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한 한국콜마 회장]②"학벌사회 절감, 뱅커 때려치우고 기업인 변신"

'화장품 업계 신화' 윤동한 회장 인터뷰 "지방대 출신이라 실력으로 승부"
"부친 별세 후 맏이 무게감 느껴…공사장 야간 경비일하며 대학 생활"

(서울=뉴스1) 대담=서명훈 산업2부장 정리=이승환 기자 | 2019-07-09 08:00 송고 | 2019-07-09 09:37 최종수정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이 8일 서울 서초구 한국콜마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7.8/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이 8일 서울 서초구 한국콜마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7.8/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1970년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은 당시 23살의 나이로 국내 최대 금융기관 가운데 하나였던 서울 농협중앙회(현 NH농협은행)에 입사했다. 고액 연봉이 보장됐던 은행은 당시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하지만 윤 회장이 대한민국이 '학벌 사회'라는 것을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낀 때도 바로 이 시기다. 

"학력 콤플렉스가 아예 없었다면 거짓말이죠. 그러나 제가 서울대를 나왔다면 그렇게 열심히 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서울대 출신들은 주변에서 일단 실력을 인정하고 봅니다. 저는 지방대 출신이라 '실력'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어요."
윤씨의 입사 동기 중 지방대 출신은 그가 유일했다. 그를 제외하면 모두 스카이(SKY, 서울대·고려대·연세대)를 졸업했다.

'스스로 증명하는 삶'은 결국 화장품 업계 신화를 썼다. 청년 윤동한은 '윤동한 회장'이 됐다. 국내 최대 화장품 제조자개발생산(ODM) 업체 한국콜마 윤동한 회장 얘기다. 

한국콜마가 비상하기까지 그는 '입지전(立志傳)'을 남겼다. 민간 기업들을 대상으로 주로 영업하는 기업간 거래(B2B) 업체라 일반 소비자는 '한국콜마'라는 이름이 친숙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지금 'K뷰티' 열풍이 불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한국콜마를 꼽는다. 업계 관계자들은 "국내 화장품 생태계를 활성화하고 경쟁력도 몇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내리는데 주저함이 없다. 지난해엔 매출 1조원 시대를 활짝 열며 바야흐로 전성시대를 맞았다. 
지난 8일 서초구 한국콜마 본사 집무실에서 윤 회장과 마주 앉았다. 어림잡아 봐도 족히 수백 권이 되는 서적 사이로 '우보천리(牛步千里-우직한 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입시 50여일 앞두고 부친 별세…"오남매 가장 역할 해야해서 교사꿈 포기"

"눈물이 많은 편은 아닌데…첫 눈물은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흘렸죠. 그 충격이란 겪지 않으면 모를 것입니다. 그래도 시험은 봐야 하니까, 어떻게든 마음을 추슬러 입시를 치렀어요."

1947년 경남 창녕 출생인 윤 회장은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다. 유년기엔 한국 전쟁을 겪었고 학창 시절엔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다. 5남매 중 장남이었던 윤 회장의 원래 꿈은 교사였다.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이었던 부친의 영향 때문이다.

교사 꿈을 이루기 위해 사학 전공을 희망했다. 그러던 중 대학 입시를 50여 일 앞두고 부친이 별세했다. 아버지를 잃은 '입시생' 윤동한군에게 담임선생님은 일갈했다.

"사학과 가서 돈을 어떻게 벌려고 그러냐. 네 밑으로 동생이 넷이나 되고 어머니와 외할머니도 네가 챙겨하지 않으냐. 이놈아, 정신 차려라."

NH농협은행 재직 시절 윤동한 회장(한국콜마 제공)© 뉴스1
NH농협은행 재직 시절 윤동한 회장(한국콜마 제공)© 뉴스1

윤 회장은 담임선생님의 이 말을 여전히 잊지 못한다. 아버지가 사망하면 어머니가 아닌 큰아들이 가장 역할을 하는 게 당시 한국 사회 풍습이었다. 윤 회장은 수도권 명문대 진학이 가능할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다. 윤 회장은 가족 곁을 떠나 수도권에서 '유학'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오남매의 맏이라는 무게감을 느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윤 회장은 경북 경산시 소재 영남대학교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영남대는 가족이 사는 곳과 지근거리에 있는 데다 학비 부담도 없었다. 가장 역할을 해야 했던 그는 캠퍼스 낭만을 꿈꿀 수도 이룰 수도 었었다. 대학 시절 내내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과외 교사를 하고 공사장 야간 경비 일도 했다.

적성을 고민할 여유도 없었다. 그는 교사의 꿈 대신 급여 수준이 높은 은행을 선택했다. 농협중앙회 입사 시험을 보고 합격했다. 구두 한 켤레를 1800원에 팔던 시절, 1970년대 당시 농협중앙회의 월급은 무려 9만원이었다.

"회사에는 '스카이 출신'이 가득했습니다. 주눅 들지 않기 위해 요즘 표현으로 '자기계발'을 거듭했지요. 무수히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역사책에 답이 있다'는 생각으로 나관중의 '삼국지', 박경리의 '토지',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달달 외우듯이 읽었어요. 어떤 업무를 맡든 '내가 주인으로 있는 회사의 일'이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차별… "오로지 실력으로 평가받는 기업가 되기로 결심"

그러나 '보이지 않은 차별'은 해소되지 않았다. 출신에 따른 기회의 불평등이 분명했다. 주요 보직 이동이나 승진 기회가 오지 않았다. 실력은 '1등'이라고 자부했지만 명문대 출신들이 늘 그 기회를 차지했다. 윤 회장은 "실력보다는 출신 학교가 우선이라는 것을 처절히 깨달았다"며 "우리 사회가 '참 냉혹하구나' 실감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나의 적이 된다'라는 미국의 사상가·시인인 랄프 왈도 에머슨이 남긴 이 말이 큰 위로가 됐고 마음 가다듬게 만드는 계기가 됐어요. 이후 실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을 직업은 무엇일까 고민했지요. 바로 기업가였어요. 교사가 되겠다는 꿈 이후 새로운 꿈이 제게 생긴 것이지요."

창업을 결심한 배경이다. 기업인은 오로지 실력으로 평가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업가 꿈이 새로 생기니 마음의 갈등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고 말했다. 새로운 삶을 위해 현재의 혜택도 포기해야 했다. 윤 회장은 입사 5년 만에 '신의 직장' 농협중앙회를 그만뒀다. 퇴사 후 중소기업 대웅제약에 입사했다. 주변에서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창업을 위한 배움의 장소로 중소기업만 한 곳이 없었습니다. 대기업보다 인재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중소기업에서는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판단했죠. 그 과정에서 창업에 필요한 경험을 다양하게 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대웅제약에서 15년간 재직하면서 관리·영업·마케팅·생산 등 기업 운영에 필요한 업무를 모두 경험했습니다."

대웅제약 재직 시절 윤동한 회장(한국콜마 제공)© 뉴스1
대웅제약 재직 시절 윤동한 회장(한국콜마 제공)© 뉴스1

대웅제약 임원 시절 그는 다시 한번 주변을 놀라게 했다. 40대 나이에 부사장으로 승진하는 등 탄탄대로 걷던 대웅제약에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다. "정신 차리라"며 말리는 손길을 뿌리쳤다.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연봉을 두 배로 올려주고, 최고급 차량까지 제공하겠다는 스위스 제약회사의 '스카우트' 제의도 거절했다. '창업해야겠다'는 목표의식이 그만큼 뚜렷했던 것이다.

윤 회장은 1990년 화장품 OEM 업체 일본콜마와 손잡고 한국콜마를 설립했다. 설립 당시 사무실 16.5㎡(약 5평) 규모에 직원 수는 4명에 불과했다. 창립 29년 만에 직원 수는 3800명으로 늘었고 한국콜마는 국내 화장품을 대표하는 업체로 자리 잡았다. 윤 회장은 "대웅제약 시절 경험한 품질관리 노하우는 훗날 화장품 사업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거듭 강조했다.

"창업 후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남들이 쉬는 주말에 잠시 갖는 휴식 시간조차 사치로 느꼈어요. 이렇게 일할 수 있는 이유는 제가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기업을 만들겠다는 꿈 말이죠. 예비 창업자는 회사를 만들기 전에 스스로 돌아봐야 해요. 자신이 이 '일'을 즐기는가. 그리고 진심으로 바라는 꿈인가. 꿈이 있어야 고난을, 위기를, 삶의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자금난 위기 때 '파격 제안…"가야 할 곳 분명히 설정하고 전진해야"

창업 후 꽃길만 걸은 것은 아니다. 직원 월급을 제때 주지 못할 정도로 자금난에 허덕이기도 했다. 윤 회장은 이때 한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다. 화장품 업계에서 여전히 회자하는 '파격적인 제안'이다.

윤 회장은 '최고 품질의 화장품 생산을 약속할 테니 계약금을 먼저 달라'는 조건을 고객사들에 제시했다. 납품 이후 비용 전액을 지불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당시로서는 누구도 상상 못 할 제안이었다. 모두가 '말도 안되는 제안'이라고 말렸다. 자칫 '갑'인 고객사의 심기를 거드려 주문이 끊길 수도 있다는 우려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예상을 깨고 적중했고 현재 국내 모든 화장품 제조 업체의 거래 기준이 됐다.

"계약금을 미리 받고 최고 품질의 완제품을 공급하면 상생의 신뢰 관계를 구축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가야 할 곳을 분명히 설정하고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목표를 분명히 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소의 걸음으로 우직하게 걷는 게 제 삶의 목표이자 지향점이었습니다."

③편에 계속…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이 지난 8일 서울 서초구 한국콜마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7.08/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이 지난 8일 서울 서초구 한국콜마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7.08/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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