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본문 바로가기 회사정보 바로가기

우리 곁에 있는 화교들의 역사, 그 속의 불편한 진실

[신간] 화교가 없는 나라

(서울=뉴스1) 이영섭 기자 | 2018-10-25 08:51 송고
화교가 없는 나라 표지© News1

137년 우리 곁에 머물러온 화교들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그 속에서 우리의 부끄러운 부분도 들춰낸 책이다. 

우리가 조명하지 않아왔던 화교들의 고단했던 137년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그 속에 웅크리고 있는 화교배척사건들, 열악한 화교 재산권 및 영주권 상황 등 우리의 자화상도 비춘다.
먼저 이 책에 믿음이 가는 것은 저자의 깊은 화교공부 내공이다.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는 1999년 대구 영남일보 기자 시절 화교 차별 문제를 접한 이후 20년째 화교 연구 한우물을 파왔다. 당시 화교학교 학생에게 들은 "(차별과 경멸로 화교를 대하는) 한국인이 싫어요!" 라는 절규가 그를 새로운 인생으로 이끌었다고 한다.

일본 교토대에서 조선화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후쿠치야마 공립대에서 15년간 교수로 있다가 2014년 인천대로 옮겼다. '조선화교와 근대동아시아', '근대 인천화교의 사회와 경제'(공저), '동남아화교와 동북아화교 마주보기'(공저), '한반도 화교사' 등의 책을 냈다. 또 일본, 중국, 싱가포르 등 화교 연구학술지에 꾸준히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이 책은 화교에 관한 여러 궁금증들에 대한 답이다. 중국인은 왜 한반도에 이주해 화교가 된 것일까, 화교사회는 어떻게 조직되고 작동하고 있었나, 중국의 한반도 주재 외교기관은 화교를 어떻게 보호했을까, 화교 정체성 유지에 있어서 화교학교는 어떤 역할을 했나, 화교는 어떤 종교생활과 문화생활을 했나, 화교와 조선인 및 한국인은 어떤 관계에 있었나, 화교의 경제생활은 어땠고 왜 화교경제는 쇠퇴했나 등에 대한 탐구가 책 내용이다.
우리 역사에서 화교가 본격 등장한 것은 1882년 임오군란때였다. 이홍장의 부장 오장경은 당시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조선으로 와 흥선대원군을 체포해 중국으로 압송한뒤 명성왕후를 다시 권좌에 오르게했다. 이 때 군과 함께 상인인들이 와 상업을 활동을 전개했고, 당시 조선 조정은 중국인의 조선 이주를  인정하면서 거주 및 상업활동의 보장을 문서로 약속했다. 이후 화교는 1944년 7만명이 넘었지만, 지금은 2만명 정도다. 이런 연유에서 오장경을 기리는 화교들의 제사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이주를 시작했던 화교의 상당수는 산둥(山東) 출신으로 우리 민족과 격동기를 함께 겪었다. 이들은 중화요리점(식도) 이발소(면도칼) 양복점(가위) 등 삼도업(三刀業)을 비롯해 주단포목업, 주물공장, 양말제조, 채소채배 등에 능력을 발휘하며 조선경제에 큰 역할을 담당한다. 건축기능공들도 뛰어나서 서울의 명동성당과 약현성당 등의 건축물에도 이들의 역할이 두드러졌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1927년과 1931년의 화교배척사건이 발생한다.

1927년 12월 7일 당시 이리(전북 익산)에서 만주 거주 조선인에 대한 중국 관헌의 탄압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린다. 집회 참가자들은 화교 상점으로 몰려가 문과 창문을 깨고 폐점과 퇴거를 강요했다. 일부 화교는 구타당했다. 화교 습격은 전국 각지로 번졌고, 500여명의 화교들은 피난길에 올랐다. 

1931년엔 더 큰 규모의 배척사건이 발발한다. 7월 2일 중국 장춘 만보산 근처에서 조선인 농민이 중국 관헌과 충돌했다는 국내 보도(후에 오보로 판명)로 촉발된 '만보산사건'으로 전국 각지에서 화교습격 사건이 발생했다. 무려 화교 200명이 사망하고 화교경제는 초토화됐다고 한다. 
  
평소 화교에 대한 조선인들의 감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일제의 이간질 등이 원인으로 작용한 듯하다. 두 민족간 화해 노력이 없던 것도 한 배경으로 꼽힌다. 하지만 우리가 화교들을 비참하게 대했던 것은 역사적 사실로 남을 것이다.

또한 한반도에서 화교들의 권리 보장 수준은 상당히 낮았다. 1936년 공표된 법률에 의해 화교들은 50평 이상의 상업용 토지를 보유할 수 없는 등 부동산 소유가 엄격히 제한됐다. 이 규제는 해방후 잠시완화됐다가 5·16 군사쿠데타 이후 이 부활됐으며, 결국 1999년 폐지됐다. 1세기 가까이 화교 소유권이 침해된 셈이다.

화교들의 거주자격, 영주권, 참정권은 더 비참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평생을 보낸 화교들도 2002년 영주권이 부여되기 전까지 1년~5년을 주기로 영주권을 갱신해야 했다. 태평양전쟁 후 영주권을 보장받았던 재일동포들에 비교해서도 열악했던 셈이다.

저자는 137년 화교사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조선 해방을 꼽으면서 이를 계기로 조선 화교사회의 쇠퇴가 시작됐다고 본다. 저자는 "20년 화교 연구는 나를 깊이 성찰하는 시간이었고 한민족과 한반도의 경제와 사회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 시간"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오랜 기간 우리 곁에 있어온 화교들이 이웃인지, 이방인인지를 묻는다. 이웃이라면 이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화교가 없는 나라'라는 이 책의 역설적인 제목은 이런 것들을 묻는 듯하다.

한편 이 책은 흥미로운 주제들도 많이 다룬다. 명동 유명 중국집 아서원 소유권 분쟁사건, 한국식 중화요리 변천사, 21세기 들어 조선족을 중심으로 대량 유입되면서 변화하는 화교사회, 북중 무역을 주무르는 북한 화교, 화교사회 내부의 작동 원리 등이 눈길을 끈다.

◇화교가 없는 나라…경계 밖에 선 한반도 화교 137년의 기록 / 이정희 지음 / 동아시아 / 1만5000원


sosabul@

이런 일&저런 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