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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무 회장 별세…"소탈·온화·끈기·결단", 글로벌 LG 키운 리더십

1995년 회장 취임 후 매출 30조→160조 5배 이상 성장
디스플레이·중대형 2차전지 세계 1위, 車부품 새 동력 기반 마련

(서울=뉴스1) 오상헌 기자, 김정률 기자 | 2018-05-20 11:07 송고 | 2018-05-20 21:22 최종수정
구본무 LG 회장이 지난해 9월 LG사이언스파크 마무리 건설 현장을 점검하는 모습.  왼쪽 두번째부터 하현회 (주)LG 사장, 구본무 LG 회장, 유진녕 LG화학 CTO 사장, 안승권 LG전자 CTO 사장, 구본준 (주)LG 부회장(LG그룹 제공)© News1
구본무 LG 회장이 지난해 9월 LG사이언스파크 마무리 건설 현장을 점검하는 모습.  왼쪽 두번째부터 하현회 (주)LG 사장, 구본무 LG 회장, 유진녕 LG화학 CTO 사장, 안승권 LG전자 CTO 사장, 구본준 (주)LG 부회장(LG그룹 제공)© News1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남이 하지 않는 것에 과감히 도전해 최고를 성취해 왔던 것이 LG의 전통이고 저력이다. 이제 '세계 초우량'을 목표로 하는 강한 LG를 만들자."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1995년 2월22일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에서 회장 취임식을 갖고 내놓은 일성(一聲)이다. 그로부터 23년, LG는 매출액 160조원 중 110조원이 해외 매출인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세계 시장을 주름잡는 TV·생활가전 부문 외에도 디스플레이, 중대형 2차전지 분야 등에서 세계 1위다. 구 회장이 취임 당시 그렸던 미래가 성큼 현실이 된 것이다. 
◇'이웃집 아저씨'처럼 소탈·온화…끈기·결단의 리더십

20일 오전 숙환으로 타계한 구 회장은 LG 71주년사(史)에서 회사를 영속 성장이 가능한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낸 최고경영자(CEO)로 평가받는다. 23년의 회장직 재임 기간 동안 LG의 주력인 전자, 화학, 통신서비스 등 3대 핵심 사업군을 키워냈다. 자동차부품과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차세대 디스플레이, 에너지, 바이오 등 차세대 성장 사업의 기반도 마련했다. 

1945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구 회장은 연세대를 거쳐 미국 애슐랜드대학교를 졸업하고 클리블랜드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5년 LG화학 심사 과장으로 입사해 유지총괄본부장을 거쳐 1980년 LG전자 기획심사 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81년 이사로 승진한 후 일본 도쿄주재 이사와 상무를 지내고 1985년에는 회장실로 자리를 옮겨 전무와 부사장(1986년) 부회장(1989년)으로 일했다. 입사 20년 만인 1995년 친부인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고 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재계에선 "재벌 총수답지 않게 소탈해 '이웃집 아저씨' 같은 느낌이지만, 사업과 경영 활동에선 '끈기와 결단'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비즈니스맨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구 회장 특유의 온화하면서도 강단 있는 리더십이 LG를 글로벌 우량 기업으로 키워냈다는 것이다. LG 안팎에선 구 회장이 자신의 장례를 '비공개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러달라는 뜻을 남긴 것에도 평소 성품이 반영돼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미래사업 키워라"…디스플레이·중대형 2차전지 세계1위

디스플레이, 2차전지, 통신사업은 구 회장 특유의 리더십이 빛을 발한 사례로 꼽힌다. 1998년 구 회장은 대규모 장치산업인 디스플레이 사업 진출을 결정한다. IMF(국제통화결제기금) 외환위기의 와중에 정부가 주도한 '빅딜' 논의로 반도체 사업 유지가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미래 먹거리가 필요했다. 구 회장은 LG전자와 LG반도체의 LCD(액정표시화면) 사업을 따로 분리해 'LG LCD'를 설립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20년 후 LG는 디스플레이 세계 시장 1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20년간 40조원 이상을 쏟아부어 연간 20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세계 1위 기업으로 우뚝 섰다. 1995년 경북 구미의 첫 번째 공장 가동 당시 1100명이던 임직원수는 현재 3만여명에 달한다.  

그룹 부회장 시절인 1992년부터 구 회장이 주도적으로 육성한 2차전지도 마찬가지다. 당시 영국 출장에서 2차전지를 본 구 회장은 새로운 성장사업임을 직감하고 사업 진출을 결정했다. 하지만 투자 및 연구개발(R&D) 과정에선 수없는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성과가 나오지 않는데 접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변의 조언이 잇따랐다. 그 때마다 구 회장은 "꼭 성공할 수 있다"고 독려했다고 한다. LG화학은 결국 중대형 2차전지 부문에서 세계 최고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 됐다. LG화학의 전기차 배터리 사업은 그룹의 미래이기도 하다. 현재 세계 30여 곳의 완성차 업체에 공급한다.

LG의 주력인 이동통신사업 역시 구 회장 취임 직후(1996년) 뛰어든 분야다. 2000년 유선사업 인수로 통신사업을 강화했고, 2010년 LG텔레콤, LG데이콤, LG파워콤 등 통신 3개사를 합병해 LG유플러스가 출범했다. 출범 초기 LG유플러스의 시장 안착은 쉽지 않았다. 경쟁사에 비해 네트워크에서 밀렸고, 국제적으로도 고립된 주파수를 사용해 고객 선호도도 높지 않았다.

구 회장은 "4G LTE 시대에 대비해 과감히 네트워크에 투자하라"고 지시했다. 투자도 1조7000억원으로 증액해 당초 3년이던 LTE 전국망 구축을 9개월 만에 끝내고 서비스를 시작했다. LG유플러스는 결국 2011년까지 17%대를 맴돌았던 시장 점유율을 20%대까지 끌어올리고 시장을 재편했다. 

© News1 최진모 디자이너
© News1 최진모 디자이너

◇'글로벌 LG' CI 변경 결단, 대기업 첫 지주사 전환

사업 포트폴리오 못지않게 기업문화를 글로벌 위상에 걸맞게 바꾼 것도 구 회장이었다. 구 회장 취임 직전인 1994년 그룹 명칭은 '럭키금성'이었다. 국내에선 막강한 브랜드 파워를 가진 명칭이어서 주변에선 CI 변경 반대 의견이 심했다고 한다. 구 회장은 그러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려면 CI를 바꿔야 한다며 변경 작업을 끈기있게 추진했다. 현재 LG의 심벌마크인 '미래의 얼굴'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도 구 회장이었다. 

국내 대기업 최초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을 결정한 것 역시 구 회장의 결단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가 반면교사가 됐다. 당시 국내 대기업들은 문어발식 순환출자와 사업 확장의 덫에 걸려 어려움을 자초했다. LG는 순환·상호출자 구조 고리를 해소하고 2003년 3월 지주회사와 자회사의 수직적 출자구조로 지배구조를 바꿨다. 

지병으로 경영 일선에서 사실상 물러나기 직전까지는 미래 성장동력 사업을 육성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 자동차 부품과 에너지 성장사업 기반을 마련하고 서울 마곡에 그룹 R&D 집결체인 LG사이언스파크를 조성했다. 

LG그룹 고위 관계자는 "구 회장은 평소 한 해의 이익만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씨를 뿌리고 시장을 이끄는 시도를 했는지가 중요한 사업 성과 판단기준이란 지론을 여러번 강조했다"며 "단기 성과에 연연하지 말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전장(전자장비) 등 자동차 부품은 LG 주요 계열사들의 미래 먹거리 사업으로 성장했다. LG화학의 전기차배터리 세계 1위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이노텍 등이 전기차, 스마트카 등 차세대 자동차 산업을 위한 각종 부품과 솔루션 개발사업을 육성한다.


bbor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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