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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4·19 '혁명'…제주 4·3은 '사건' 왜?

70주년 맞아 "올바른 이름 찾자" 목소리 높아

(제주=뉴스1) 고동명 기자 | 2018-04-03 09:33 송고 | 2018-04-03 14:18 최종수정
제주4·3평화공원 전시간에 설치된 백비 © News1
제주4·3평화공원 전시간에 설치된 백비 © News1
제주4·3평화공원 1관. 주민들의 피신처였던 동굴을 본딴 터널을 지나면 화강암 재질의 '백비(비문없는 비석)가 누워있다.

백비 안내문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고 쓰여있다.
안내문은 또 "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며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고 써졌다. 

2008년 평화공원 준공과 함께 설치된 길이 3m, 너비 90cm, 높이 50cm의 이 백비는 4·3의 정명, 즉 올바른 이름을 찾자는 의미가 담겼다.

6월항쟁, 5·18민주화운동, 4·19 혁명 등과 달리 4·3은 그동안 봉기, 항쟁, 사태, 사건 등 다양하게 불려왔다.
4·3에 올바른 이름을 붙여주자는 정명운동이 70주년을 맞아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는 4·3을 비교적 중립적인 '사건'으로 칭하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폭동, 또 누군가는 민중항쟁으로 부르며 지금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규배 4·3연구소 이사장은 "진상보고서상 4·3을 사건으로 규정하고는 있지만 언젠가는 4·3이 시민권이 부여된 즉, 대다수 사람들이 공감하는 이름을 얻어야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백비가 설치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소장은  "4·3 70주년을 맞아 불의에 맞선 정의로운 투쟁에 걸맞은 이름을 부여하고 희생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28일 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와 기념사업위원회, 민주노총 등이 주관해 제주시청에서 열린 '4·3민중항쟁 70주년 정신계승 범국민대회'에서는 '민중항쟁'이라고 쓰인 새로운 백비가 공개됐다.

민중항쟁론은 1947년 미군정에 반발에서 비롯된 3·1절 기념대회 발포사건과 이어진 3·10 도민총파업, 그리고 단독정부 수립 반대가 4·3 발발의 배경임을 주목한다.

당시 미군정을 향한 도민들의 불만이 컸던 시기 열린  3·1절 기념식 시위에서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 아이가 치여 다쳤다. 기마경찰이 아이를 그대로 두고 가자 군중들이 항의했고 무장경찰이 총을 쏴 민간인 6명이 숨졌다.

이 발포사건으로 민심은 극도로 악화됐다. 3월10일부터는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 총파업이 벌어졌다.

미군정과 경찰은 시위 주동자를 대거 검거하면서 궤멸 상태에 빠진 제주 좌익진영은 결국 결사 항쟁을 결심, 1948년 4월3일 새벽 350명의 무장대가 도내 12개 경찰서 등을 일제히 공격하면서 4·3이 발발한다.

반면 신구범 전 제주지사가 주축이 된 4·3진실규명 도민연대 등 일부 보수진영은 4·3을 공산당의 폭동으로 규정하고 있디.

이 단체는 "4·3 공산폭동을 항쟁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고하게 희생되신 4·3피해자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4·3이 70년간 제이름을 찾지 못한 건 이념 갈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지난 2일 MBC라디오 양지열의 시선집중과의 전화인터뷰에서 "(4·3공식명칭은)남북분단이 아직 통일로 결말 지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념적 편 가르기의 틀에 규정당할 수 있는 면이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원 지사는 "5·18이나 4·19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헌법적으로도 정리가 돼 있지만 4·3은 과정 자체가 남북한의 분단과 해방 정국에서 이념대결이라는 현대사의 아직 풀지 못한 문제가 좀 있다"고 설명했다.


k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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