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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바다에서 유럽의 여유로운 정취 느끼세요"

파독 간호사에게 들은 남해 독일마을의 역사

(경남=뉴스1) 윤슬빈 기자 | 2017-11-21 17:34 송고 | 2017-11-21 18:09 최종수정
편집자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지역 명사(名士)와의 만남으로 대한민국 구석구석의 숨겨진 매력을 재발견할 수 있는 '지역 명사와 함께하는 문화여행'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지역의 역사와 생생한 삶을 함께한 명사를 이야기꾼으로 발굴, 육성해 '인생담'과 '지역 고유의 문화관광 콘텐츠'를 접목함으로써 지역의 고품격 여행상품을 내놓는다는 계획이다. 지역명사로 선정된 석숙자 여사와 함께 경남 남해로 떠난 문화여행에서 머나먼 타지에서 청춘을 바친 '파독 간호사'들을 알아 가는 시간을 가졌다.
파독 간호사인 석숙자 여사© News1 윤슬빈
파독 간호사인 석숙자 여사© News1 윤슬빈

1960년대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였다. 당시 국민소득은 76달러로 당시 태국은 220달러, 필리핀 170달러에 반에도 못 미쳤다. 그렇게 우리에게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그렸듯 당시 한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젊은 청춘 남녀들은 머나먼 독일로 간호사로 광부로 떠났다.
  
석숙자 여사도 그중 한 명이었다. 1973년 간호사로 독일에 갔다. 라이힐링앤(Leiclingen)이라는 작은 도시에 머문 최초의 동양인이었다. 온갖 어려움을 견디며 특유의 붙임성으로 '코리안 엔젤'이라는 애칭까지 얻었다.
  
경남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독일마을에서 만난 석 여사는 30년간 보낸 파독 간호사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당시 한국의 8급 공무원 월급이 1만5000원이었는데 파독 간호사는 그의 10배 되는 독일인과 같은 수준으로 15~20만원씩 받았다"며 "그중 생활비 3~4만원을 제외하고 모두 한국으로 보냈다"고 말했다. 그들이 송금한 금액은 1억153만 달러로 대한민국 총 수출액의 10% 해당했다.
  
경남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독일마을© News1 윤슬빈 기자
경남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독일마을© News1 윤슬빈 기자

독일마을은 2001년 남해군이 산업역군으로 독일에 파견돼 한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한 독일거주 교포들이 고국으로 다시 돌아와 정착할 수 있도록 조성된 곳이다.
 
아늑한 남해 바다를 바라보며 독일에서 공수해온 건축 자재로 만들어진 하얀색 벽과 주황색 지붕으로 이루어진 독일 양식의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이국적인 풍경에 유럽 특유의 여유로운 정취도 묻어난다. 

독일마을은 2001년 남해군이 독일거주 교포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조성한 마을이다.© News1 윤슬빈 기자
독일마을은 2001년 남해군이 독일거주 교포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조성한 마을이다.© News1 윤슬빈 기자
독일식으로 꾸며진 베를린 성 내부 관광객들을 위해 독일식 소시지와 맥주, 커피 등의 음료를 내어주고 있다.© News1 윤슬빈 기자
독일식으로 꾸며진 베를린 성 내부 관광객들을 위해 독일식 소시지와 맥주, 커피 등의 음료를 내어주고 있다.© News1 윤슬빈 기자
파독 간호사와 광부를 유쾌하게 그려낸 벽화© News1 윤슬빈 기자

마을의 조성은 김두관 의원이 남해군수이던 시절 독일 광부로 30년을 고생했던 친형이 남해로 정착하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친형을 보며, 독일에서 연금을 받고 사는 교포들이 서로를 가족으로 삼으며 이곳에서 정착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교포들이 정착하는 데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석 여사는 "독일마을로 자리 잡기 이전에 이곳의 땅은 돌로 가득하고 뱀이 많은 황무지였다"며 "또 타지에서 오랜 생활을 해왔기에 세상 물정도 몰라 교포들을 상대로 사기 치는 이들도 많았다"고 말했다.

파독  전시관에서 파독 간호사들이 서울을 떠나 프랑크푸르트공항으로 향했던 당시 사진을 보며 설명하는 석숙자 여사© News1 윤슬빈 기자
파독  전시관에서 파독 간호사들이 서울을 떠나 프랑크푸르트공항으로 향했던 당시 사진을 보며 설명하는 석숙자 여사© News1 윤슬빈 기자

"독일은 유일하게 우리의 손을 잡아준 나라였죠."
석 여사는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로부터 경제는 어려웠고 다른 나라에선 한국을 회생하기 어려운 나라로 여기던 때, 모두가 등을 돌렸을 때 독일이 우리의 손을 잡았다고 회상했다.
 
역사적으로 독일과 한국의 교류는 조선 시대부터 비롯됐다. 파독 전시관 초입에 들어서면 '한·독 통상 우호항해조약 사본'이 걸려있다. 1883년 11월26일 고종과 독일 황제인 프로이센 국왕이 양 제국의 지속적인 우화관계와 양국 국민들의 편안한 통상 교류를 위해 조약을 맺었다.  
 
독일에서 간호사를 근무했던 당시 앳된 얼굴의 석숙자 여사.(오른쪽)© News1 윤슬빈 기자
독일에서 간호사를 근무했던 당시 앳된 얼굴의 석숙자 여사.(오른쪽)© News1 윤슬빈 기자
한·독 통상우호항해조약© News1 윤슬빈 기자
한·독 통상우호항해조약© News1 윤슬빈 기자

석 여사는 비록 젊은 청춘을 다 바쳤지만 독일이란 나라에 대한 애정도 있었다. 그는 "독일로 파견간 간호사들의 나이는 20대 초반이었다"며 "대학 나온 이는 스물셋, 간호학교 나온 이들은 스무살로 당시 결혼 적령기였다"고 말했다.

고국을 떠난 광부들과 간호사들은 서로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고, 총각과 처녀들은 결혼하며 3년 계약으로 잠시 머무를 계획이던 독일에서 30년, 40년을 정착하게 된다.  

그가 독일에 고마움을 느끼는 부분은 독일인 간호사와 똑같은 대우를 해준 것이었다. 그는 "독일에서 임신한 한국 간호사들은 1년을 쉬었어야 했다"며 "병원에서도 손해고 독일이란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음에도 출산비용을 모두 지원해줬다"고 설명했다.
   
파독 전시관 한쪽 면을 채우는 하독 간호사들의 메시지© News1 윤슬빈 기자
파독 전시관 한쪽 면을 채우는 하독 간호사들의 메시지© News1 윤슬빈 기자
독일마을에서 열리는 옥토버페스트© News1 윤슬빈 기자
독일마을에서 열리는 옥토버페스트© News1 윤슬빈 기자

그런데도 고국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했고, 상처도 많이 받았다. 석 여사는 한국에서 좋아하던 마늘을 입에도 대질 않는다.
  
석 여사는 "70년대 독일과 대한민국은 문화가 100년이 정도 떨어졌다는 얘기가 있었다"며 "화장실 문화부터 식문화까지 화장실 문화라든지 차이가 너무 나서 자격지심이 들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는 "김치를 먹고 가면 마늘 냄새난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었다"며 "지금이야 우리나라의 위상도 높아졌기에 '김치가 얼마나 건강에 도움 되는 음식인 줄 아느냐'라고 물었겠지만, 그땐 위축되고 상처를 받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파독 간호사들과 광부들은 한 달 이상이 주어지는 휴가에 바다가 있는 네덜란드로, 폴란드로 떠나 평소 먹고 싶던 삼겹살이랑 마늘, 된장을 원 없이 먹으며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 News1 윤슬빈 기자

현재 독일마을엔 머나먼 타지에서 울고 웃으며 세월을 보낸 25가구의 독일 교포가 거주하고 있다. 교포들은 비록 청춘을 다 바쳤지만 그 시간을 결코 고생한 시간만으로 기억하지 않기 위해 마을에서 다양한 독일 문화 행사를 열고 있다. 매년 10월엔 독일 민속 축제인 '옥토버페스트'를 개최하고 있다.

교포들은 방문자들에게 독일 와인, 맥주, 소시지 등을 제공하며 이들이 직접 독일 생활에서 불렀던 동요, 가요 등을 합창하며 그들이 느낀 문화를 소개한다. 지난 10월6~7일에 열린 축제엔 총 11만명이 다녀갈 만큼 경남의 인기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석숙자 여사와 함께 하는 문화여행은 아직 상품화 준비 단계다. 단, 단체 방문 예약 문의는 한국관광공사 관광콘텐츠팀(033-738-3681) 또는 섬여행학교(061-666-2017)으로 하면 된다.


seulbi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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