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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만에 정당방위 인정…'공릉동 살인사건' 양석주씨의 투쟁기

"매일을 죽고 싶은 생각과 싸우면서 버텨왔다"
"'여론살인'에 분노…끝까지 싸워 제도 개선할 것"

(서울=뉴스1) 한재준 기자 | 2017-10-22 06:00 송고
'공릉동 살인사건'이 발생한 장소. © News1 손형주 기자
'공릉동 살인사건'이 발생한 장소. © News1 손형주 기자

"얘기하고 싶은 게 참 많아요. 그동안 제 삶은 투쟁기자 생존기였죠"

2년을 악몽 속에서 살아온 양석주씨(38)는 의외로 담담했다. 오히려 자신이 '은둔자'로 비치는 것이 싫다며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는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살아와야 했다. 지난 2015년 9월24일 결혼을 앞두고 있던 양씨는 예비신부를 잃었다. 새벽에 양씨의 집에 침입한 군인 장모씨(20)가 흉기로 예비신부를 해친 것이다. 비명을 듣고 잠에서 깨어난 양씨는 몸싸움 끝에 흉기를 빼앗아 군인 장씨를 살해했다.

"도대체 나한테 왜?" 9년간 교제해온, 심지어 결혼을 두 달 앞둔 여자친구를 잃은 예비신랑에게 처음 든 생각이었다. 그는 사건 이후 졸지에 살인자가 됐다. 양씨는 괴로움에 다니던 회사도 1년간 휴직했다.

당시 사건을 맡은 경찰은 양씨의 정당방위를 인정해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지만 '살인자'란 낙인은 계속 양씨를 괴롭혔다. 주위의 시선과 한 시사 프로그램의 잘못된 보도는 양씨에게 감당하기 힘든 짐을 안겼다. 오히려 피해자인 양씨를 여자친구와 군인을 살해한 살인자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사건 직후에는 공허감이 찾아왔어요. 있던 사람이 없으니까. 그리고 억울한 감정이 들더라고요. 9년을 사귀면서 한 번도 싸운 적 없는 여자친구였습니다. 가족과 다름없었죠."
양씨의 공허감과 억울함은 오랜 시간 지속됐다. 하지만 감정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양씨가 부인을 살해하고 구하러 온 군인까지 해쳤을 것'이란 취지의 방송이 나간 후 비난의 화살은 양씨에게로 쏟아졌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여론살인'에 정말 힘들어서 '목숨을 끊을까' 생각도 했다"며 "주위 친구들과 가족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정말 죽었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결국 양씨는 방송사를 상대로 언론중재위원회에 중재 신청을 했다. 양씨는 피해 보상금도 필요 없으니 정정 보도를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양씨는 "온라인 비난은 참을 수 있었지만 중재위에서조차 잘못된 보도가 고쳐지지 않는 것을 보고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분노가 커지기 시작했다"며 "잘못된 보도가 나가는데도 경찰과 검찰 또한 피의사실 공표가 된다며 도와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검찰은 양씨의 정당방위를 인정해 사건 발생 약 2년 후인 지난달 29일 살인죄에 대해 '죄 안됨' 처분을 내렸다. 검찰 단계에서 정당방위를 인정한 극히 드문 사례다. 대법원에서 정당방위를 인정한 사례도 지난 1967년과 1990년 발생한 사건 2건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미 양씨는 많은 걸 잃었다.

"'이제 내 인생은 망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남들처럼 악착같이 아파트 사려고 노력 할 필요도 없고요. 다 잃었잖아요"

양씨는 자신을 '해방자'라고 칭했다. 더 이상 아둥바둥 살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제 양씨에게 남은 건 스스로에게 내준 '숙제'뿐이다. 그는 이미 새로운 투쟁기를 시작했다. 당시 잘못된 보도에도 정정하지 않았던 방송사를 상대로 형사 고소를 한 것이다.

양씨는 "지난 시간 매일을 울고 술 마시고, 죽고 싶은 생각과 싸우면서도 믿을 건 법이라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아니었다. 이제 잘못된 제도를 고치기 위해 싸워나갈 것"이라고 힘있게 말했다.

그는 곧 지급 받을 범죄피해자 구조금도 장인, 장모에게 전달할 계획이다. 그래야 여자친구와 그 가족들을 해방시켜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갑자기 누군가를 잃으면 그 동네를 못 떠나더라고요. 여길 떠난다는 건 저와 여자친구를 둘러싼 모든 게 완벽하게 정리됐을 때. 그때 떠날 수 있는 거죠"

양씨는 아직도 여자친구와 살았던 집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hanant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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