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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올린 개혁보수신당…"흩어지면 망한다" 보수정당史 바꿀까

보스 정치인 중심, 선거용 분열 있었지만 결국 통합
원내교섭단체 구성 규모 보수당 분당은 최초

(서울=뉴스1) 김영신 기자 | 2016-12-27 11:03 송고 | 2016-12-27 11:23 최종수정
 
 

'보수는 분열하면 망한다'는 속설을 깨뜨릴 수 있을까.

새누리당 비주류 의원 29명(선도탈당 김용태 의원 포함 30명)이 무거운 숙제를 안고 27일 대거 탈당, 가칭 개혁보수신당 창당의 닻을 올렸다.
우리 정치사에서 '분열'은 야권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현 야권은 수많은 분열과 통합을 거쳐왔지만 여권은 유력한 '보스' 정치인과 영남권이라는 지역 기반을 교집합으로 뭉쳐왔다.

물론 과거 보수진영에서도 분열은 있었지만 규모나 영향력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이번 개혁보수신당이 보수 정당 최초의 분당으로 기록되고 있다.

우리나라 보수정당의 역사는 1951년 창당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자유당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 독재에 맞서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 하야를 촉구하는 자유당 의원들은 탈당했고, 끝까지 이 전 대통령 편을 들며 당에 남았던 이들은 1960년 4·19 혁명과 함께 쇠락했다.
이 전 대통령 하야 후 '장면 내각'(2공화국)이 들어서며 야당인 민주당이 정권을 잠시 잡았었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장면 내각을 몰아낸 박정희 전 대통령 등 군부세력이 1963년 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박 전 대통령이 서거, 제3·4공화국이 끝이 나며 공화당이 소멸하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끄는 신군부 세력이 1981년 민주정의당(민정당)을 만들었다.

1987년 민주화 바람 속에서 재야에 있던 김영삼(YS), 김대중(DJ)을 주축으로 통일민주당이 출현했다. 통일민주당은 여당인 민정당에 맞서는 '보수 야당'을 표방하며 6·29 항쟁을 이끌었다.

또한 같은해 박정희정권 핵심이었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과거 공화당을 재건한 '신민주공화당'을 만들었다.

민정당은 6월 항쟁 후에도 노태우 전 대통령을 통해 집권에 성공했지만 1988년 13대 총선에서 대패한다.

그러면서 '보수 대연합'을 명분으로 1990년 그 유명한 '3당합당'으로 거대 여당이 탄생했다. 민정당과 YS의 통일민주당, JP의 신민주공화당이 '민주자유당'으로 통합된 것.

현 새누리당은 전신 정당 역사를 이 민자당에서부터 서술하고 있다. 민자당은 물리적으로는 한 당이었으나 각 계파를 중심으로 권력투쟁이 치열했다.

결국 1995년 JP가 현역의원 5명을 데리고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만들었다. 이 자민련이 보수당의 첫 분열로 기록된다.

자민련은 그해 6월 제1회 전국지방선거에서 충청권과 강원지사를 차지한 데 이어, 1996년 15대 총선에서 원내 3당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자민련은 충청권 기반인 데다, 창당 당시 민자당에서 JP와 함께 탈당한 현역 의원은 5명에 그쳐 '분당'으로는 기록되지 못한다.

JP의 자민련은 1997년 대선에서는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를 지지(이른바 DJP연합), 야당으로의 정권교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보수는 분열하면 망한다"는 속설의 대표적 예다.

한편 민자당 소속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YS는 '문민정부'를 강조하며 1996년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꿨다.

YS는 신한국당으로 간판을 바꿔 달며 '젊은피' 인재들을 대거 영입했고 이는 기존 영남권은 물론 전국으로까지 보수 지지층을 넓히는 기반이 됐다.

1990년 3당합당 자료사진 (한국사진기자협회 보도사진연감) 
1990년 3당합당 자료사진 (한국사진기자협회 보도사진연감) 

자민련에 이은 보수정당의 두번째 분열은 1997년 대선 국면에서 나왔다.

19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회창 총재에게 패배한 이인제 전 의원이 결과에 불복하고 탈당, 국민신당을 만들었다.

이 의원을 따라나간 현역 의원은 당시 8명이었고, 이 전 의원이 그해 대선에서 낙선하면서 대선이 끝난 뒤 해산했다. 역시 '분당'으로는 기록되지 못했다

신한국당은 1997년 15대 대선 직전인 11월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바꿨지만 정권을 잡지 못한 채 야당이 됐다.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이 이회창 총재에게 반기를 들고 탈당, 한국미래연합이라는 사실상의 '1인 정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박 의원이 대선 직전인 그해 11월 다시 한나라당으로 복당하면서 한국미래연합 역시 수개월 만에 사라졌다.

1996년 창당됐던 JP의 자민련은 2000년대 들어 선거에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지 못하는 부진한 성적을 거뒀다.

그러다 2003년 17대 총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 등으로 인해 충남에서만 4명이 당선하고 비례대표 후보였던 JP를 포함해 비례는 단 한석도 얻지 못하며 사실상 소멸했다.

JP는 17대 총선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고, 자민련은 이후 군소정당으로 명맥을 유지하다 2006년 4월 한나라당과 통합했다.

한나라당과의 합당에 참여하지 않고 탈당한 심대평 전 충남지사가 2006년 1월 국민중심당을 창당했다. 국민중심당은 매 총선 때마다 자유선진당(2008년), 선진통일당(2012년)으로 당명을 바꿨지만 2012년 18대 대선을 앞두고 결국 한나라당에 흡수됐다.

2000년대 전반기까지 보수정당의 분열은 소위 '보스'인 유력 정치인을 중심이었다면 2000년대 후반에는 공천으로 인해 벌어졌다.

2007년 대선 전 한나라당은 친이(親이명박)계와 친박(친박근혜)계로 양분돼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하자 친이계가 장악한 한나라당에서 2008년 18대 총선 전 '친박 학살 공천'이 벌어졌다.

이때 대거 낙천한 친박계 의원들이 대거 탈당했다. 당시 서청원 의원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정당 '친박연대'는 18대 총선에서 당선자 14명을 냈다. 김무성 의원 등 다른 일부는 정당은 만들지 않되 '친박 무소속 연대'를 형성해 12명이 당선했다.

이렇게 한나라당을 탈당한 친박계가 대거 당선하자 이명박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표에게 러브콜을 청했고, 친박 무소속 연대 출신 의원들은 18대 총선 후 곧바로 한나라당으로 복당했다.

친박연대 의원들은 한나라당에 바로 복당하지는 않았지만 서청원 의원이 공천헌금 사건에 휘말리며 구속되면서 뚜렷한 리더없이 작은 여권 세력으로 2012년 초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다 친박연대 일부는 같은해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으로 옮겼다. 친박연대 수장이었던 서청원 의원은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캠프에서 역할을 하고, 이듬해인 2013년 10월 화성갑 보궐선거를 통해 새누리당에 돌아왔다.

자료사진
자료사진

이렇게 역사에서 보듯 보수정당의 분열은 보스 정치인을 중심으로 하거나, 대선·총선 전 선거용으로 급조됐다가 결국 기존 당으로의 통합되길 반복했다. 한번에 탈당하는 의원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한 전례도 없었다.

그러나 이날 새누리당 비주류의 탈당은 이제까지의 보수 분열과는 확연히 다르다. 개혁보수신당은 창당과 동시에 원내교섭단체(20명)를 구성할 뿐 아니라 의원들의 지역 분포도 영남권은 물론 수도권과 강원을 망라한다.

여권 유력 대선주자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개혁보수신당을 택한다면 충청권 의원을 비롯해 새누리당에 잔류한 의원들의 대거 합류가 예고된다.

그러면 개혁보수신당이 이제까지의 보수정당 역사를 뒤집고 보수의 '본류'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현재 새누리당 주류 측은 개혁보수신당을 평가절하하면서 "결국 대선 전 다시 합당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에 대해 개혁보수신당은 "다시 통합은 없다"며 완전히 일축하고 있다.

개혁보수신당이 보수는 분열하면 망한다는 기존 명제를 완전히 깨뜨리고 새 역사를 쓸지, 아니면 역사의 전철을 밟을지 시험대에 올랐다.


eriw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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