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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숙 10대들 잠깐의 착각? 고립된 '청소년 성소수자들'

성적 정체성 아닌 '성장과정 일탈'로 여겨져…"가족·학교 이해 절실"

(서울=뉴스1) 류보람 기자, 손미혜 기자 | 2015-05-22 21:17 송고 | 2015-05-26 16:47 최종수정
© News1 방은영 디자이너
© News1 방은영 디자이너

최근 여고생 간의 입맞춤 장면을 방영해 논란에 휩싸였던 한 방송사의 드라마 '선암여고 탐정단'에서 극중 동성 친구를 연인으로 둔 여고생 수연은 결국 학교를 떠났다.

동성 친구와 입을 맞추는 사진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유포되자 수연에게 돌아온 것은 우유 세례를 비롯한 폭력과 따돌림이었다.
사건은 수연이 사진에 얼굴이 나오지 않은 친구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둘 사이의 관계를 끝내고, 학교를 떠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이 과정에서 교사와 동급생들로부터 수연의 존재와 감정은 전면 부인당했다.

지난달 2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는 2003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청소년 성소수자 활동가 '육우당'의 12주기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렸다. '육우당'은 담배, 수면제 등 그가 생전 가까이 둔 6가지 물건을 가리켜 붙인 이름이다.

학교에서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밝혔다 따돌림을 당한 뒤 자퇴를 했던 그는 19살의 나이에 성소수자 인권단체 사무실에서 스스로 목을 매 세상을 떠났다.
육우당의 죽음으로 청소년 성소수자 문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청소년보호법에서는 동성애 차별조항이 삭제됐다. 그러나 극중 수연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학교를 떠났듯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피부로 느끼는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많은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여전히 이름 석 자를 드러내지 못했다. 활동가들은 각자의 활동명을 사용했고, 신원 비공개를 전제로 인터뷰를 요청하는 취재진에게도 상당수가 난색을 표하며 "미안하다"고 답했다.

여전히 학교나 또래 집단에서 '커밍아웃'(성소수자가 스스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는 것)은 언감생심이며 '아우팅(타의에 의해 알려지는 것)'을 당할 경우 배척당하고 폭력에 노출되는 경우가 상당수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서울시가 2012년 실시한 아동·청소년 대상 인권실태조사에 따르면 성소수자 청소년을 친구로 사귈 수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약 25%에 불과했다. 남학생의 경우 21.7%로 36.5%의 응답률을 보인 여학생들에 비해 특히 거부감을 나타낸 응답자가 많았다.

아우팅으로 인해 학교를 등지는 이들도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 제도권 밖의 삶을 택하기 겁이 나 고통을 감내하며 지내는 경우도 있다.

서울시내 모 대학 성소수자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A씨는 자신의 학창시절을 "눈과 귀가 멀고 말 못 하며 지낸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공부를 잘 하는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폭력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동성애 성향이 알려진 뒤부터는 반 친구들 속에서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었다"며 "존재를 부인당하는 것을 참으며 공부만 했다"고 말했다.

A씨는 "혼자 고민하고 숨기며 스스로도 '내가 잘못된 건가'라는 생각을 수없이 해 본 것이 사실"이라며 사회가 강요하는 가치관과 규범이 가하는 압박이 청소년 성소수자들에게는 한층 무겁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당시에도 고민을 공유하는 친구들이나 성소수자 청소년의 삶을 이해하고 지원하는 선배들이 있었다면 훨씬 덜 힘겨운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며 "대학에 입학해 공동체 활동을 하면서 특히 그런 생각이 든다"고 안타까워했다.

청소년 성소수자들에게는 가정도 안전한 공간이 아니다. 어린 자녀가 이성애자가 아니라는 사실 자체에 큰 충격을 받고 교화나 치료의 대상으로 여기는 가족들로부터 폭언과 폭력을 당한다. 심한 경우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당하기도 한다.

실제로 '선암여고 탐정단' 해당 회분이 방영된 이후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은 학부모단체였다. 학부모들은 방송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장기 청소년들에게 교육상 부적절한 내용을 미화해 내보냈다며 사과와 관계자 징계를 요구했다.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 소속 회원들이 지난달 서울 양천구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앞에서 jtbc ‘선암여고 탐정단’ 동성키스장면 중징계 방침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News1 허경 기자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 소속 회원들이 지난달 서울 양천구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앞에서 jtbc ‘선암여고 탐정단’ 동성키스장면 중징계 방침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News1 허경 기자
성소수자이기에 이들이 겪는 차별과 폭력은 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가되는 경우가 많다.

추모제에 참여한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의 청소년 활동가 '에버'는 "청소년 성소수자는 '소수자 중에서도 소수'라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사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에 대해 학교나 가정을 비롯한 사회에서는 '미성숙한 아이들의 잠깐의 착각'이라며 낙인을 찍고 깎아내린다. '아이들'이니까 보호해야 한다는 프레임으로 성적 주체성을 억압하려 들기도 한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말 문을 연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에서는 이들에게 심리치료와 함께 다른 청소년 혹은 성소수자들과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건강을 해친 이들에게 의료생활협동조합 등을 통해 필요한 의료 조치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기도 한다. 가정이나 학교를 피해서, 혹은 타의에 의해 나온 이들에게는 쉼터가 되기도 한다.

물질적인 지원도 중요하지만 이성애자들이 그러하듯 자연스럽게 자신의 감정과 사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참가자들은 입을 모았다.

박에디 띵똥 상임활동가는 "청소년 성소수자는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혐오에 주눅들거나 겁을 먹고 성장한다"며 "성인이 되어 대학에 들어가거나, 일터에 가서도 가장 먼저 신경쓰는 부분이 자신의 정체성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여부"라고 말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정체성을 인정해 주는 사람들"이라며 "자신이 게이라고 말하는 아들에게 '며느리랑 싸울 일은 없겠구나'라고 말해 주는 부모님이 늘어날 때 청소년 본인도 자신의 정체성을 비로소 흠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 정책과 학교 차원에서 다양성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교육 프로그램과 괴롭힘을 막는 장치를 함께 마련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는 '성소수자 청소년에게 가해지는 폭력, 어떻게 막을 것인가'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열린 바 있다. 

공익인권법센터 공감의 장서연 변호사는 당시 동급생·학부모들의 성소수자 자체에 대한 인식 부족과 교사들의 관심 부족으로 인한 방관을 성소수자 청소년들이 가정과 학교 안에서 폭력에 노출되는 원인으로 지적했다.

장 변호사는 "국가 차원의 실태조사를 통해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을 마련하고 학교 차원에서도 교사와 교직원, 학생들을 상대로 성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교육을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pade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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