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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라고 말하는 그리스를 위한 변(辨)…굴곡과 저항의 역사

[세상곰파기] 치프라스와 테오도라키스

(서울=뉴스1) 최종일 기자 | 2015-02-27 10:52 송고
"카테리니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않으리…"
그리스 전통악기 부주키가 빚어내는 선율이 애잔한 곡 '기차는 8시에 떠나네(To Treno fevgi stis okto)'는 그리스가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나치에 저항한 한 그리스 청년을 위해 만들었다. 가사는 소식 없는 청년 레지스탕스를 기다리는 여심을 담고 있다.

테오도라키스의 삶은 자신의 작품과 다르지 않았다. 1943년부터 1950년까지 아테네 음악원에서 수학한 그는 이 시기에 그리스인민해방군(ELS) 소속으로 반(反) 나치 투쟁에 가담했다. 청년 테오도라키스가 굴곡진 그리스 현대사의 한 가운데로 뛰어든 순간이었다.

독일의 강점은 나치의 그리스 침공 직후인 1941년 4월부터 1944년 10월까지 지속됐다. 이 시기 그리스 국민들의 삶은 처절하게 짓밟혔다. 수도 아테네에서만 4만명이상이 굶어죽었고 수만 명이 나치의 보복으로 살해됐으며 경제는 황폐화했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그리스 국기와 EU기가 게양돼 있다. 뒤로 아크로폴리스의 신전이 보인다. © AFP=News1
그리스 아테네에서 그리스 국기와 EU기가 게양돼 있다. 뒤로 아크로폴리스의 신전이 보인다. © AFP=News1

아테네에 있는 신들의 언덕 아크로폴리스에서 나치 독일의 깃발 하켄크로이츠는 쉽게 휘날리지 못했다. 나치의 그리스 점령이 시작된 날, 국기 호위 임무를 맡고 있던 군인 콘스탄티노스 코우키디스는 독일 장교로부터 나치 깃발을 달라는 명령을 받았다.
코우키디스는 그리스 국기를 내려 몸에 감싼 뒤에 언덕 아래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코우키디스가 실존 인물인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가 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기념 명판이 설치돼 영웅을 기리고 있다.

주축군의 첫 침공은 이탈리아가 먼저였다. 이탈리아는 1940년 10월 28일 이탈리아 군이 통과할 수 있도록 그리스가 길을 터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오니아스 메탁사스 당시 그리스 총리는 "노(Ochi·오히)"라고 맞섰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세 시간도 안돼 군을 보냈다.

하지만 그리스는 산악 지형을 이용해 맹렬히 저항해 이탈리아군을 알바니아로 내몰았다. 15세기 중반부터 약 400년간 오스만투르크 지배 하에서 산악 지역은 저항의 장소였다.

그리스는 2차 대전 이후 매년 10월 28일을 '오히 데이'로 지정해 압제에 저항한 그리스인으로서의 자부심을 확인하고 있다.

나치는 물러갔지만 시련은 걷히지 않았다. 전후 고조된 동·서 대립의 골은 그리스도 비켜가지 않았다. 좌우 이념에 따른 분열은 1946~49년 내전으로 번졌다.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정부군과 공산당이 주축인 그리스 민주군이 충돌했다. 초반 열세를 딛고 정부군이 승리한 이 전쟁에서 5만 명이 전사했다.

테오도라키스는 내전 때 옥살이를 하며 모진 고문을 당했고 산채로 두 차례 매장당하기도 했다. 내전 뒤 우파 정부가 들어섰지만 폭압의 정치는 이어졌고 정치적 혼란은 사라지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 파리에서 수학한 테오도라키스는 1960년 귀국해 민중 음악에 심취했다.

테오도라키스는 1963년 민주화 운동 지도자가 암살되자 거리로 나섰다. 하지만 1967년 군부 쿠데타가 발생해 그의 작품은 연주뿐 아니라 청취도 금지됐다.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그는 세계적 음악가들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나자 프랑스로 망명했고 1974년 군부가 물러날 때까지 해외를 떠돌았다.

군부 시절에 시민들의 권리는 철저히 외면당했고 정당은 해산됐다. 시민들의 저항은 들불처럼 번졌다. 1973년 11월 군부 반대 시위를 벌이던 아테네공과대학생들은 새벽녘 교문을 뚫고 들어오는 탱크를 맨몸으로 맞서야 했다. 이 과정에서 교정 밖에 있던 시민 24명이 희생됐다.

민주화된 그리스에선 1981년 사회주의 정부가 처음 집권해 복지국가 건설을 주창했다. 1990년대 들어 우파 정부가 집권하기도 했지만 정책의 흐름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유로존 가입 이후 서서히 침몰하던 경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그대로 고꾸라졌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지난 24일 구순을 바라보는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를 찾아 조언을 구했다. <출처: 테오도라키스 홈페이지> © News1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지난 24일 구순을 바라보는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를 찾아 조언을 구했다. <출처: 테오도라키스 홈페이지> © News1
 

5년여 간에 걸친 경제 불황과 긴축은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지난해 말 그리스 의회예산국의 보고에 따르면 250만 명이 최소한도의 생활수준인 빈곤선 아래에서 살고 있다. 380만 명은 빈곤선 아래로 추락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리스 인구는 약 1100만 명이다. 청년층 절반 이상은 일자리가 없다.

30여 년 간 정착된 양당제를 깨고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이끄는 급진좌파연합 시리자가 지난해 말 집권하게 한 것은 국난과 찢겨진 자존심이었다. 치프라스 총리는 "그리스에서 인도주의적 위기를 몰아내겠다"고 공언해 표를 받았다. 하지만 자신들의 방식만을 고집하는 채권국 독일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시리자 지도부는 국민들 앞에서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치프라스 총리는 지난 24일 올해로 89세를 맞은 테오도라키스를 찾아 조언을 구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전사"라고 불렀다. 테오도라키스는 총리 뒤에는 국민들이 있고, 총리는 국민들의 뜻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희망은 있다. 시리자가 힘을 내서 독일의 ‘나인(Nein)’에 맞서 ‘오히(Ochi)’라고 외치는 것이다"며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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