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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돌아온 애인 만나듯 시를 읽다

김수열의 '빙의'

(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2015-01-30 15:29 송고 | 2015-01-30 15:50 최종수정
© News1


시의 시대라고 불린 날들이 있었다. 소설의 시대라고 불린 70년대가 끝나고 80년대, 서울대 출신의 먹물들은 물론 노동현장의 근로자들도 높은 수준의 시를 써대던 시대다.
시에 많은 것을 걸었고 시는 삶에서 솟아나는 것이라 믿으며 삶과 시를 일치시키려고 애썼던 나날들이었다. 절창이 쏟아져 나왔고 그것을 읽어줄 독자들도 충분했다.

하지만 불현듯 시는 우리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니, 우리는 더 이상 시를 찾지 않게 됐다.

군부독재와 싸우느라 진을 다 빼버렸을까. 너무나 급변한 세계에 어리둥절해 있다가 '의자 뺏기' 게임처럼 자리를 빼앗겼을까. 언어의 무기력에 당황해서일까. 상당수 시인들이 글쓰기를 자발적으로 포기했고 나오는 시들도 어딘가 맥이 풀려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자기 자리에서, 이제 돈도, 명예도, 세간의 관심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시를 쓰고 있는 시인들이 있었다. 하늘에, 땅에, 풀잎에, 공기에 빙의되면서 숨쉬듯 시를 쓰고 있는 김수열 시인도 그중 하나다. 오랫동안 찾지 않다가 시를 읽은 탓일까. 그의 시를 읽는 것은 돌아온 애인을 만나는 것처럼 신선했고 즐거웠다. 더구나 그 애인은 세월을 비껴간 듯이 여전히 힘세고, 능청스럽고, 호탕했다!    
제주도의 비경인 곶자왈에서 시인은 "뿌리 드러내 쓰러진 나무를 본다/수직의 긴장을 견디지 못한 탓이다/땅덩어리에 선 마지막 직립보행들아/하늘의 눈으로 보면/태평양 어디에 있다는 그 깊은 바다도/지구 배꼽에 고인 물이다/지상 어디에 있다는 그 높은 산도/지구 이마에 난 여드름이다('곶자왈에서')"라고 호방하게 외친다.

강정의 아이들에겐 "세계 여러곳을 다녀봤는데/이보다 아름다운 곳을 본적이 없다/얘들아/너희들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어머니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겨도 된다/그리고/이 기나긴 싸움의 시간을/아름답게 기억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중략)...구럼비 해안에 돌찔레가 보이느냐/너희들 어머니시다/범섬 너머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느냐/너희들 아버지시다('강정의 아이들에게')"라고 말한다. 이처럼 그의 자연은 그저 감상과 빙의의 대상이 아니라 싸워서 지켜야할 대상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지키듯 지켜야할 유산이다.

아마도 80년대의 시의 종언은 부유하던 무리들에게만 해당했던 건지도 모른다. 땅에 뿌리박은 나무가, 철마다 피어나는 꽃이 80년대와 90년대, 2000년대를 구별않고 자라고 피듯 삶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시는 죽지 않았다.

김수열 지음·실천문학사·8000원


ungaung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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