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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 대학 상전벽해…우골탑은 그대로

등록금 부담, 1990년대부터 더욱 커져…축제·알바 등 대학가 풍속도 변화 겪어

(서울=뉴스1) 안준영 기자 | 2015-01-07 18:36 송고 | 2015-01-08 10:09 최종수정
한 대학교 축제에서 학생들이 주점을 열고 주류를 판매하고 있다. / 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한 대학교 축제에서 학생들이 주점을 열고 주류를 판매하고 있다. / 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안타까운 모정자살(母情自殺)에 통곡하는 아들…진학문 열렸는데 어머니는 가시다니'

1975년 2월 21일자 한 조간신문에는 자식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어머니를 다룬 기사가 실렸다.
사연은 이렇다. 대구에서 가락국수 장사를 하던 신모(여·당시 50세)씨는 아들이 서울대 교육계열에 합격했지만 돈이 부족해 제때 등록을 하지못하고 집을 나가자 처지를 비관해 농약을 먹고 눈을 감았다.

예나 지금이나 등록금은 대학생을 둔 가정의 부담 1순위다. 다만 부담 강도는 세월과 비례해 더 세졌다. 

지난 70년간 대학축제와 주거문화, 아르바이트 등 대학가 문화도 시대흐름을 탔다. 
◇1965년에 쌀 10가마 팔면 사립대 1년 등록금    

자료가 부족한 탓에 해방 이후부터의 대학 등록금 추계를 산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교육부 관계자는 "산재된 과거 자료들은 있으나 정확성을 부여하기는 어렵다"면서 "공식적인 통계가 축적된 것은 2011년도부터"라고 말했다.

기록의 편린들을 통해 등록금 흐름을 더듬어볼 수는 있다. 

농협중앙회에 따르면 1965년 대학 신입생의 1년 등록금은 국·공립이 1만9800원, 사립은 3만4320원이었다.

그 시절 일반미 80㎏ 한가마가 3210원, 황소 4백㎏짜리 한마리는 4만699원이었다. 농민들이 쌀 10.7가마, 소 0.8마리를 내다팔면 사립대에 들어간 자녀의 한해 뒷바라지는 그럭저럭 할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30년 뒤인 1995년에는 새내기 대학생의 1년 등록금은 국·공립이 234만4000원, 사립은 539만800원으로 각각 뛰었다.

당시 쌀 한가마가 11만5380원, 황소 한마리는 235만2619원인 점을 감안할 때 자녀들이 사립대에 들어가 1년간 공부를 하려면 부모들이 쌀은 46가마, 소는 2.3마리를 내다 팔아야 했다. 30년간 부담이 쌀은 4.4배, 소는 2.9배 많아진 셈이다. 

◇1990년대부터 등록금 치솟고 계열간 격차도 커져 

우리나라 대학 등록금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비싼 것은 정부가 '수익자부담 원칙'에 따라 학생·학부모가 부담하도록 한데다 1989년부터 '등록금 자율화' 정책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민간 싱크탱크인 대학교육연구소에 따르면 1990년 사립대 전체 계열 학생 1인당 연간 등록금은 100만원 대였다. 

인문사회계열 등록금(143만원)과 비교할때 자연과학계열은 18만원, 공학·예체능 계열은 28만원, 의학계열은 50만원 더 비싸 계열간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2000년에는 인문사회 388만원, 자연과학 462만원, 공학 508만원, 예체능 532만원, 의학 606만원 등 10년새 3배 가량 인상되고 계열간 격차도 더욱 벌어졌다.

2005년에는 인문사회계열 등록금도 500만원을 상회했고 공학·예체능계열 700만원, 의학계열 821만원 등 고공행진이 계속됐다.

사립대 전체 계열 학생 1인당 평균 등록금은 2000년 449만원, 2005년 609만원, 2010년 754만원으로 10년 동안 300만원 가량 인상됐다. 사립대에 다니는 학생들이 부담하는 등록금이 1년 평균 30만원씩 늘어난 셈이다.

다만 2010년부터는 정부가 등록금 인상 억제 정책을 추진하면서 상승폭이 둔화됐다. '반값 등록금' 요구 속에 2012년에는 국가장학금 제도가 도입되면서 등록금 인하를 적극 유도하기도 했다.

© News1 최진모 디자이너

◇축제·주거문화 등 대학가 풍속도가 달라져

1960년대 대학 축제는 '축전'으로 불렸다. 대학생들만의 행사라는 특권적 성격이 강했다. 포크댄스, 가장행렬 등 서구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통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70년대 축제는 학술제, 예술제, 체육제로 짜여졌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통과시키자 대학 축제가 지녀야 할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여파로 1980년대 대학 축제는 민중 또는 이념이 화두였다. 축제는 대부분 군사정권을 반대하는 시위로 폐막됐다.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수단으로써 민족성이 부각되면서 탈춤, 마당극, 풍물 등이 단골 레퍼토리로 떠올랐다. 

1990년대는 학생운동과 연계된 행사보다는 학내밴드 공연 등 문화행사로 축제를 구성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2000년대 대학축제는 상업성 논란에 휘말렸다. 돈을 들여 연예인을 초청했고 술 중심의 축제 문화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2010년대에 들어와서는 주점을 대신해 취업특강, JOB콘서트, 각종 경진대회 등을 선보이거나 캠퍼스밖 지역주민들과 함께하는 축제가 등장하기도 했다.

대학생들의 주거형태도 변천을 겪었다.

하숙집이 태동한 것은 1940~50년대다.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을 위해 학교 주변에 숙식과 빨래 등을 제공하는 독특한 형태의 주거방식이었다. 하숙집이 대학생들의 보금자리로 일반화된 것은 1970~80년대다. 

1990년대 후반에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지면서 원룸이 하나 둘 생겨났다. 2000년대 초 경제 사정이 나아지면서 원룸은 대학생의 보편적인 주거형태로 자리잡았다. 

각종 고시 준비생이나 보증금을 내기 어려운 대학생들은 고시원에 둥지를 틀었다.

최근에는 경기침체를 반영하듯 같은 집에서 방은 각자 따로 쓰면서 주방, 거실, 세면실, 화장실 등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셰어하우스가 나타났다.

아르바이트 풍속도도 달라졌다.

1970년대에는 과외 아르바이트가 인기를 끌었다. 지금과 달리 중·고교생 집에 함께 살면서 공부를 가르치는 입주과외 형태가 많았다. 가난한 남자 명문대생과 부잣집 여제자 또는 제자 누나와의 러브스토리는 심심찮게 영화 소재가 되기도 했다.

신군부가 과외를 전면 금지한 1980년대 들어서는 음식점이나 호프집 서빙이 새로운 알바로 등장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자동차 급증과 함께 주유소 알바로 몰리기도 했다.

최근에는 편의점, 커피숍 등 프랜차이즈 점포에서 하는 알바가 늘고 최저임금 등 노동 관련 법규를 지키지 않는 업주의 횡포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이에 맞서려는 알바노조도 등장했다.


andr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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