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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 해방 후 16차례 바뀐 대입 변천사

1969년 예비고사로 대학입시체계 기틀 마련…1994년부터 수능 도입했지만 문제점은 여전

(서울=뉴스1) 안준영 기자 | 2015-01-02 15:48 송고 | 2015-01-02 15:49 최종수정
2015학년도 수능일인 지난해 11월 13일 오전 서울의 한 고교에서 수험생이 기도를 하고 있다.(왼쪽) 같은 시각 다른 고사장 앞에서 학부모가 눈물을 닦고 있다. / 뉴스1 © News1 송은석 기자,양동욱 기자
2015학년도 수능일인 지난해 11월 13일 오전 서울의 한 고교에서 수험생이 기도를 하고 있다.(왼쪽) 같은 시각 다른 고사장 앞에서 학부모가 눈물을 닦고 있다. / 뉴스1 © News1 송은석 기자,양동욱 기자

대학 진학과 관련한 우리나라 제도는 숱한 시행착오를 반복해왔다. 1945년 해방 이후 지난 70년간 우리 대입제도는 크게 16차례나 바뀌었다.

대학별 단독시험제를 시작으로 대입 국가고사, 대입 예비고사, 학력고사,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등 대입 시험 종류와 전형요소 반영방법 등 골격이 바뀐 것만도 평균 4년에 한번꼴이다.
대입제도 개편을 어떻게 쪼개보느냐, 총론과 각론을 어떻게 나누냐에 따라 변경 횟수는 천차만별이다. 세부 변경까지 포함하면 40차례 이상 굴곡을 겪었다는 분석도 있다. 설익은 입시정책도 문제지만 대입 제도가 수시로 바뀌는 것은 더 심각하다.

대입제도의 큰 맥락은 세가지로 나눌수 있다. 국가에서 주관하는 국가고사와 대학이 자체적으로 치르는 대학별 고사 그리고 고교 고육과정을 얼마나 충실히 수행했는지를 평가하는 고교내신이다. 이 세가지 요소를 축으로 우리 대학입시는 서로 조합하면서 변화해왔다.

◇수능시험기(1994년~현재)
수험생의 선택권은 넓히고 출제 과목수는 줄여 입시부담을 덜어주는데 역점을 뒀다. 이 시기 선발방법은 수능과 고교내신, 대학별 전형을 병행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수능시험의 경우 도입 첫 해에는 8월과 11월 두 번의 시험을 치렀지만 이듬해부터는 11월에 한 번만 보고 있다.

1994~1996년에는 수능, 고교내신, 본고사로 학생을 선발했다. 그러나 학교교육 황폐화와 사교육 확대 등 부작용이 발생하면서 3년만에 본고사가 폐지된다.

1996년에는 대학별 모집단위를 학과별 모집단위에서 학부제 방식으로 변경해 이 때부터 대학 1,2학년은 학부 소속으로 다니고 3학년에 올라가면서 세부전공을 정하도록 했다.

1997~2001년에는 수능, 학교생활기록부, 논술고사를 병행했다. 고교내신도 학교생활기록부로 대체됐으며 전, 후기 2회로 제한했던 수험생 지원 기회는 4~5회까지 가능토록 했다.

수험생은 다양한 수능과목을 선택해 웅시할 수 있고 대학은 학과 특성에 맞는 과목영역 우수자를 선발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고차원적인 수능문제 출제 등으로 인해 고교교육의 파행운영, 사교육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02~2007년에는 수능, 학생부, 대학별 자율결정 방식을 사용했다. 대입시험에서 대입전형으로 대입제도의 운영틀이 변화됐다. 특차모집을 폐지하고 특별전형 확대, 무시험 전형제 도입, 수시모집을 허용한 것이 특징이다. 선발방법은 수능과 학생부, 논술에 추천서, 심층면접 등이 추가돼 대학의 자율권을 확대했다.

교과성적 자료 이외에도 비교과 영역의 다양한 전형자료들을 대입 선발 기준으로 삼을 수 있도록 했다. 모집방법과 시기도 특별전형, 수시모집, 정시모집 등으로 다양해졌다.

특히 2005년에는 인문, 자연, 예·체능 계열 구분이 사라지고 모든 시험영역을 전부 또는 일부 선택할 수 있는 선택형 수능이 도입됐다. 2007년에는 원점수 외에 성적표에 영역/과목별 표준점수와 백분위가 표기됐다.

2008년부터 대학에서는 입학사정관제 확대, 적성검사 전형 등 우수한 인재 선발을 위한 다양한 전형을 실시하고 있지만 수능 성적 의존도는 여전히 높고 사교육 부담, 내신성적 부플리기 등 문제점은 여전하다.

© News1 최진모 디자이너

◇학력고사기(1982~1993년)

전 단계인 예비고사가 본고사를 치르기 위한 자격시험의 성격을 가졌다면 학력고사는 사실상 대학입학시험이다. 이 시기 대입제도는 주로 학력고사와 고교내신을 병행했다.

1982~1985년에는 대입학력고사 성적과 고교내신으로 대학 신입생을 뽑았다.

그러나 학력고사가 예비고사와 마찬가지로 단편적인 암기위주의 평가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고교내신제 역시 성적에 따른 학생 서열화, 지역과 학교 차이를 무시한 획일적 내신 산출제도 등의 문제가 제기됐다. 또한 학력고사 점수를 갖고 대학과 학과를 선택해 응시하다보니 눈치작전을 통해 적성보다는 경쟁률이 약한 학과에 원서를 넣거나 반대로 배짱 지원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1986~1987년에는 대입학력고사, 고교내신, 논술고사를 혼합했다. 논술고사에서 창의력과 사고력을 요하는 문제를 출제해 수험생들의 고차원적 사고능력을 짚어볼 수 있다는 평가는 받았다. 그러나 실제 대학입시에서 논술고사 반영비율은 10% 이내에 불과했다.

1988~1993년에는 대입학력고사, 고교내신, 면접고사를 병행했다. 대입에서 반영비율이 높지 않았던 논술고사 대신에 대학별 면접고사를 끼워넣은 것이다. 특히 이 시기에는 '선시험, 후지원'이 아니라 '선지원, 후시험' 방식으로 극심한 눈치작전을 줄여보려고 했다. 

하지만 면접고사 역시 대학입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많지 않아 대학의 선발권 보장이라는 취지에 부합하지는 못했다.

◇예비고사기(1945~1981년)

비리와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국가가 대입시험에 관여하기도 하고 대학 자율권 침해라는 비판 속에 다시 대학이 단독으로 주관하는 대학별 고사를 채택하는가 하면 두가지 병행도 이뤄진 시기였다.

1945~1953년에는 대학에 100% 자율권을 주는 대학별 단독고사가 실시됐다. 

그러나 6·25 한국전쟁 중 대학생 병역특전을 받기 위한 부정 입학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1954년에는 국가연합고사를 도입했지만 수험생들의 이중부담 문제가 제기되면서 1년만에 사장됐다.

1955~1961년까지는 다시 대학의 자율성을 존중하기 위해 대학별 단독고사가 부활했다. 사상 최초로 고교내신 성적을 대입제도에 반영한 무시험전형도 생겨났지만 대학서열화 및 학사부조리를 야기했다.

1962년에는 대학입학자격 국가고시를 도입했고, 이듬해인 1963년에는 기존 대학입학자격 국가고시제와 대학별 본고사를 병행했다. 1964~1968년에는 대학별 단독고사를 부활했지만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인한 질적 저하 문제가 나타났다. 

대학 입시가 체계를 잡은 건 1969년도부터다. 본고사보다 먼저 보는 시험이라고 해서 예비고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1969~1972년에는 국가에서 주관하는 대입예비고사와 대학에서 주관하는 대학별 본고사를 병행했다.

앞서 대학입학자격 국가고시와 마찬가지로 예비고사에 합격한 학생만이 대학별 본고사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에서 실시하는 본고사는 국어와 영어, 수학 위주의 매우 수준 높은 문제가 출제된 탓에 과외 바람을 불러오면서 사회적 위화감이 조성되기도 했다.

1973~1980년에는 내신제도를 다시 병행했지만 입시 이중부담과 과열과외를 잠재우지 못했다.

1980년에는 교육개혁 조치로 대학별 고사를 폐지하고 고교 내신제를 본격 도입했다. 과외도 전면 금지했다. 대입예비고사와 고교내신만으로 신입생을 선발하도록 했다.




andr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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