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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길의 영화읽기]해무-욕망, 지옥도를 그리다

(울산=뉴스1) 이상길 기자 | 2014-08-23 06:31 송고
 
 

임필성 감독의 2005년작 <남극일기>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세계최초의 무보급 횡단으로 남극 도달불능점 정복에 나선 남극탐험대 최도형(송강호) 일행은 우연히 낡은 깃발 아래 묻혀 있던 80년 전 영국탐험대의 '남극일기'를 발견하게 된다. 일기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우리의 욕망이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이후 <남극일기>는 목적이 광기로 변해가는 과정을 몹시도 공포스럽게 그려나가며 인간의 욕망과 삶에 대해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진다.

심성보 감독의 <해무>에서 한 때 여수 바다를 주름잡았던 '전진호'는 IMF 한파로 만선의 꿈을 뒤로 하고 감척 사업의 대상이 된다.

배를 잃을 위기에 처한 선장 철주(김윤석)는 마지막 기회로 밀항자들을 실어 나르는 일을 맡아 동료들과 함께 출항한다.
하지만 수십 명의 밀항자들을 실은 전진호는 우연한 사고로 피투성이가 돼 주변 바다를 빨갛게 물들이면서 지옥도를 그려나간다.

<남극일기>처럼 역시나 인간의 욕망이 만든 지옥이다. 

 
 

공교롭게도 <해무>와 <남극일기>의 각본작업에는 봉준호 감독이 공통적으로 참여했다.

얼어붙은 남극에 비해 <해무>의 배경은 드넓은 바다지만 한 척의 배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인 만큼 욕망이 그린 지옥도는 더욱 과감하고 잔인하다.

무엇보다 2001년 실제로 발생했던 '태창호' 사건을 모티프로 하는 <해무>에서의 욕망은 좀 더 일상적이라는 점에서 그 임팩트는 더욱 강할 수밖에 없다.

가장 눈에 띠는 건 역시나 성욕. 극중 창욱(이희준)과 경구(유승목)를 통해 묘사되고 있는 수컷들의 삽입본능은 러닝타임 내내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종족번식과 관련해 가장 오래되고 일상적인 것이기에 소위 '불편한 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 점에서 유일하게 남은 여자 홍매(한예리)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보호하려 했던 막내 동식(박유천)도 욕망이 아니라고 말하긴 어렵지 않을까. 

돈에 대한 욕망은 지옥도의 시작을 알린다. 전진호가 밀항자들을 실어 나를 수밖에 없었던 건 돈 때문이었다.

생존이었다 해도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하는 돈에 대한 욕망은 마치 지옥도가 시작되면서 퍼지는 해무(바다 위에 끼는 안개)와도 같다. 앞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어떤가. 아내가 외간 남자와 정사를 벌이는 모습을 보고도 한 마디도 못하는 선장 철주는 배 안에서 만큼은 절대 권력자로 군림한다.

전진호에 대한 그의 애정이 선과 악의 판단에서 살짝 비켜나 보이기도 하지만 자기가 가진 것을 사랑하지 않는 권력이 세상에 어디 있던가. 따지고 보면 그 애정의 실체도 욕망이다.

 
 

이제부터는 욕망의 생명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욕이나 돈, 권력은 모두 전진호가 커다란 사고를 겪기 전에도 존재했다.

눈여겨봐야 할 건 그 욕망들로 인해 전진호는 나락으로 떨어지지만 욕망은 반성이나 소멸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 강해진다.

그리고 전진호가 그려나가는 지옥도는 그 지점부터 시작된다.

욕망은 바퀴벌레 같다. 지구가 멸망해도 바퀴벌레만은 살아남을 것이라는 항간의 속설처럼 아무리 슬프거나 아픈 일을 겪어도 욕망은 도무지 절망을 모른다.

아니, 약해빠진 인간은 그 순간에도 욕망에 기대어 위로받고 싶어 한다. 오죽했으면 프랑스 사상가 '장 자크 루소'도 이런 말을 했겠는가.

"욕망은 우리를 자꾸자꾸 끌고 간다. 도달할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간다. 우리의 불행은 바로 거기에 있다."

 
 

허나 <해무>는 단순히 인간의 욕망에만 초점을 맞춰서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까운 영화다.

다시 말해 보기에 따라서는 욕망 뒤에 숨어서 우리사회에 꽤 의미심장한 메타포를 던지는 영화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왜 IMF로 거슬러 올라갔을까'라는 질문부터 가져봐야 할 듯하다.

사실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은 IMF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IMF 이후 물질만능주의와 기회주의가 전진호의 타락처럼 우리 사회에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때문에 <해무>에서의 전진호는 지금 우리사회의 축소판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게 본다면 <해무>는 한 대의 기차를 통해 인류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자 했던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와도 닮은 구석이 많다.

각자의 욕망으로 표류하다 마침내 침몰하고 마는 전진호는 그래서 작금의 대한민국에 보내는 경고장 같은 것이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해무>에서 전진호에 탄 승무원들 가운데 제정신이었던 사람은 실성한 기관장 완호(문성근)밖에 없다.

"이 배 안에서는 나가 대통령이고 판사고, 느그들 아버지여"라고 외치며 절대권력을 행사했던 선장 철주는 잘못된 책임감에 스스로 미쳐가는 줄도 몰랐고, 그런 철주에게 갑판장 호영(김상호)은 바른 소리를 할 줄 몰랐다.

창욱과 경구는 돈과 함께 발정 난 수캐마냥 덮칠 여자만 쫓아다녔고, 막내 동수도 사랑에 눈이 멀어 순수성과 분별력을 잃고 만다.

배에 태운 수 십 명의 조선족들이 이름 모를 백성들이라고 친다면 사고 후 비록 충격으로 실성했지만 기관장 완호의 이 한마디는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에 와 닿았다.

미쳐버린 완호는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사람 목숨이 우선이지."

13일 개봉. 러닝타임 111분.




lucas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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