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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민주 후보 확정]문재인은 누구…월남 피난민 아들에서 대통령 후보로

(고양=뉴스1) 김승섭 기자 | 2012-09-16 07:31 송고
20일 오전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경선 후보가 광주시의회에서 광주 전남 언론감담회를 하고 있다. (문재인후보 캠프제공) 2012.8.20/뉴스1 © News1 김보영


문재인 의원이 16일 민주통합당 제 18대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다.
지난 4·11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해 19대 국회(5월 30일 개회)에 입성한지 3개월 보름, 6월 17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지 3개월만에 제 1야당의 기수로서 새누리당 정권을 교체하고 김대중 국민의 정부, 노무현 참여정부를 잇는 제 3기 민주정부 수립의 임무를 자임하게 된 것이다.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일까지 앞으로 남은 94일 동안 문 후보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 벌일 단일화 과정을 통과하면 문 후보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1대 1 진검승부를 벌여야 한다.

문 후보의 어린 시절은 지극히 서민적이다. 그는 월남 피난민의 아들이다. 1953년 경남 거제의 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돈이 없어 느껴야 하는 서러움을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
1950년 12월 흥남철수 때 잠시 피해 있는다는 심정으로 별다른 준비 없이 거제까지 피난을 온 그의 부모는 당장 살길이 막막한 상황에 놓였다. 함경도 함흥농고를 졸업한 뒤 흥남시청 농업계장으로 일했던 부친은 장사를 해보겠다며 나섰다가 빚만 잔뜩지고 손을 턴 뒤 평생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부산으로 이사를 한 뒤 생계는 문 후보 모친이 꾸려나갔지만 부친과 마찬가지로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문 후보는 어린 나이에 연탄이 잔뜩 실린 어머니의 리어카를 뒤에서 밀며 연탄배달을 도왔고, 학교를 마치면 부산 영도의 신선성당으로 달려가 배급받은 강냉이 가루와 전지분유 등 구호물품으로 끼니를 때우며 살기 일쑤였다.

당시 육군 장군이었고, 이후 대통령이 된 아버지의 밑에서 영애로 자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것이다.

때문에 문 후보는 "가난에서 비롯된 결핍 못지않게 가난이 나를 가르친 것도 무척 많았다고 말하고 싶다"며 "웬만한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는 것, 힘들게 보여도 일단 혼자 해결하려고 부딪혀 보는 것, 이런 자세가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워줬다"고 말해왔다.

그가 서민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들을 위한 경제정책을 펼치겠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기준에서 경제민주화를 하겠다고 밝힌 것은 이런 성장 배경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불공정과 맞서다

문 후보는 과외수업 한번 받지 않았지만 무난히 부산의 명문 경남중학교에 합격한다.

그러나 빈부의 격차가 확연한 경남중학교의 분위기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세상의 불공평함과 그로 인한 위화감을 피부로 느꼈고, 자연스럽게 도서관에 파묻혀 진보적 색깔을 띠고 있는 사상계 등을 읽으며 어렴풋하게 나마 사회와 신념에 대해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문 후보는 내면을 성장시키고 건강한 사회의식을 갖게 됐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는 학교에서 정학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3선 개헌 반대시위, 학교를 병영화하려는 교련에 대한 항의 등을 계기로 사회의식과 정치의식을 높였고 그가 말하는 시대정신인 '정의'라는 단어를 가슴속에 심게 됐다고 한다.

이 때 새겨진 정의라는 단어로 인해 문 후보는 부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각종 민주시위를 주도하는 길을 걷게 된다.

문 후보는 다른 길을 걸었다면 지금 역사학자나 대학교수가 되어있었을지도 모른다. 대학입학 전 그는 역사학을 공부하고 싶어 했지만 사학과를 가기에는 높은 점수가 아깝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담임선생과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경희대 법대로 진로를 바꿨다.

법대 3학년 시절 유신반대 열기가 캠퍼스를 뒤덮었고, 긴급조치가 연이어 발포되고 민청학련사건과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인혁당 사건 등이 터졌다.

이렇다 할 학생운동이 없던 경희대에도 재단 퇴진농성을 계기로 유신반대시위가 확산됐고, 문 후보는 당시 시위에 필요한 선언문을 작성하고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 수감되기에 이른다.

다행히도 담당 판사의 소신 판결로 집행유예를 받아 풀려났지만 학교에서 제적당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병역 문제로 곤욕을 치르지만 문 후보는 이 문제 만큼은 자신한다.

입대 후 훈련을 받은 뒤 특전사 공수부대로 배치됐고, 공중낙하에서부터 수중침투훈련까지 완벽히 소화해내 소위 A급 사병으로 인정받았다.

문 후보는 당시를 돌아보면서 "난생 처음 해보는 그 많은 일들이 막상 닥치니 해 낼 수 있더라는 (군대)경험, 그것이 나를 훨씬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나 싶다"며 "변호사 시절이나 청와대 시절에 처음 겪는 일을 만날 때 참고할 선례가 없어 스스로 부딪혀가야 할 때마다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율사로서의 길

문재인 앞에 붙는 수식어가 있다. 바로 인권변호사다. 1978년 2월 제대 후 복학은 오리무중, 취직하기도 어중간한 상황에서 문 후보는 부친이 소천하는 아픔을 겪는다.

당시 부친의 나이는 59세로 지금의 문 후보와 같다. 그는 뒤늦게나마 한번이라도 잘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 사법시험을 보기로 결심하고 1년만에 1차시험에 합격한다.

그러나 2차 시험을 준비하던 중 1979년 10월 부마항쟁이 터지고 급기야 같은달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게 된다.

그러나 격변기 속에서도 문 후보는 사법시험에 전념했고, 이듬해 5월 까지 이어진 소위 서울의 봄이 일으키는 소용돌이 속에서 시위참가로 구속, 유치장에 갇혀 있을 때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은 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문 후보가 군사정권 시절 검사나 판사에 임용되지 않고 구속수감 전력 때문에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은 것이 지금 시점에서 보면 전화위복이었다는 것이 그의 지인들의 얘기다.

◇사람 사는 세상과 사람이 먼저인 정치인

문재인의 인생을 말할 때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판사 임용이 무산돼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문 후보는 부산행을 결심하고 사시 동기인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의 소개로 노무현 변호사를 찾아간다.

박 전 비서관은 노 전 대통령과 고시 공부를 함께한 인연이 있었고, 함께 변호사로 일하기로 약속했다가 갑자기 검사로 임용되는 바람에 대신 문 후보를 소개한 것이다.

문 후보는 노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을 회상하면서 "매우 소탈하고 격의가 없었다. 같은 과에 속한 사람이라는 동질감을 강하게 느꼈다. 그리고 의기투합해 만남 당일 변호사 동업을 결정하고 일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문 후보는 "그와 일하며 당시 관행처럼 되어 있던 사건 알선 브로커를 단칼에 끊어버렸고, 판검사에 대한 접대도 안했다. 당연히 수입은 줄었지만 사무실을 운영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피난민 생활 등을 하며 평소 근검절약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 그 당시 두사람을 버틸 수 있게 한 힘이었다.

그들의 일련의 활동들은 법조계에서 입소문을 탔고, 이후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기꺼이 맡다보니 자연스럽게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두 변호사의 사무실은 부산,경남,울산의 노동인권 사건의 센터처럼 변했고, 둘은 재야운동에도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러던 중 1987년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다. 부산의 추모열기는 하늘을 덮었고, 부산민주시민협의회가 부산극장 앞에서 개최한 추도식은 대규모 가두시위로 이어졌다.

검찰은 시위를 주도한 노 전 대통령을 잡아넣기 위해 이미 기각된 구속영장을 들고 판사의 집을 전전하며 하룻밤에 네 번이나 구속영장을 재청구했다.

모든 매스컴은 이 같은 행태를 고발하는 기사를 집중적으로 다뤘고 이것이 이른바 '인권변호사 노무현'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문 후보는 이때 노 전 대통령과 함께 부산 변호사 사회에서는 전무후무한 호헌철폐와 직선제를 요구하는 부산 변호사 시국선언을 이끌어 냈으며 이 같은 투쟁 끝에 군사정권은 결국 항복선언인 6.29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그리고 문 후보는 노무현을 국회로 보낸다. 6월 항쟁 이후 7~8월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됐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구속되거나 해고됐다.

당시 변호사 노무현은 전국을 누비며 시위에 참여했고, 결국 대우조선 사건으로 구속되기에 이른다. 문 후보는 부산지역 변호사 120명 가운데 99명이나 되는 대규모 공동 변호인단을 꾸려 재판에 임했고, 노 전 대통령은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났지만 변호사업무는 결국 정지된다.

이후 1988년 4월 13대 총선을 앞두고 노 전 대통령은 김영삼 총재의 영입제안을 받아 신군부 5공 핵심이었던 허삼수 전 대통령 사정수석비서관을 상대로 총선에서 승리해 국회에 입성했다.

그때 노 전 대통령이 선거 구호로 쓴 '사람 사는 세상'의 후속작이 문 후보의 슬로건인 '사람이 먼저다'이다.

◇2002 대선, 그로부터 10년 후

노 전 대통령은 평생을 지역주의와 맞서 싸워왔다.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온몸으로 대항했으며, 그의 진정성을 국민들이 알아주길 바랐다. 그래서 바보 노무현이라 부른다.

노 전 대통령은 2001년 9월 대선 출마를 공식선언한 뒤 조직과 돈을 먼저 준비하기 보다는 각 분야 전문가들로 학습팀을 꾸려 국정운영에 대한 공부부터 시작했다.

대통령 후보를 뽑는 당 경선이 시작되자 문 후보는 부산과 울산지역경선의 책임을 맡는다.

PK(부산경남) 주자인 노무현이 광주의 선택을 받아 호남의 적자로 대통령에 당선되기 까지 문 후보는 부산 선대본부장을 맡아 뛰었고, 이때부터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닌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참여정부 출범이후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서 국정운영에 참여하며 살아있는 권력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정치경험이 일천한 문 후보에게는 크게 장점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2003년 1월 노무현 당선자는 문 후보를 청와대로 불렀고, 민정수석비서관이라는 중임을 맡겼다.

이때 문 후보는 노 대통령의 신임 때문에 '왕수석'으로 불리기도 했다.

문 후보는 2004년 12월 민정수석에서 퇴임했다. 그러나 한 달 뒤 탄핵심판 대리인 자격으로 노 전 대통령 곁으로 돌아왔고, 5월부터 시민사회수석으로 일했다.

2005년 1월에는 민정수석을 다시 맡아 2006년 5월까지 일했고 2007년 3월부터는 비서실장으로서 노 전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다 함께 퇴임했다. 5년 내내 노 전 대통령 옆에 있었던 것이다.

지난 14일 열린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 초청 TV토론회에서 손학규 후보가 문 후보에게 "앞으로 수많은 위기가 닥쳐올 것이다. 대통령은 고독한 자리고 위기의 순간 이를 대처하고 결단을 내려야한다. (정치경험이 거의 없는)문 후보는 어떻게 대처하겠는가"라고 물었다.

문 후보는 "그런면에 있어서는 참여정부에 있으면서 5년 내내 (고독한)노 전 대통령을 옆에서 지켜봤고, 그때의 경험이 오히려 장점이 됐다. 그 누구보다 내가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노 전 대통령 퇴임 후 그는 법무법인 부산의 변호사로 돌아갔다. 평온했다.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2009년 5월 부산대병원에서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공식발표해야했다.

노무현 재단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정치권과 거리를 두어왔지만 정치권은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

야권은 그에게 정치인의 길을 가라고 주문했고, 마다하지 못한 문 후보는 4.11총선을 통해 19대 국회에 입성한다.

총선 당시 형성한 낙동강벨트가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면서 그에 대한 평가가 추락하기도 했지만 정치인 문재인이 이제 민주당 대선후보가 된 것이다.

◇문재인의 운명과 문재인의 힘

문 후보는 4.11총선이 치러지기 전인 지난 1월 9일 SBS예능프로그램인 '힐링캠프'에 출연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문 후보는 이 프로그램의 출연으로 '문재인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거의 몰랐던 사람들에게 문재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나름 잘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는 평을 얻었다.

'힐링캠프'에서 문 후보는 "안철수, 박근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보였고 노 전 대통령과의 만남부터 이별까지의 각별한 인연을 전하면서 큰 웃음까지 이끌어내 시청자들에게 확실하게 존재감을 보여줬다.

힐링캠프 출연 이후 지지율이 오르기 시작했고, 4월 총선을 통해 국회에 입성하면서 야권의 잠룡으로 부상했다.

이후 6월 대선 출마선언 이후 결선투표 없이 경선을 통과하면서 잠재력을 보여줬다. 지난해 6월 출간한 '문재인의 운명' 또한 '노무현 향수’에 젖어 있는 이들에게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을 각인시키는데 유효하게 작용했다.

또 본 경선 시작전인 8월 6일 출간한 '사람이 먼저다(문재인의 힘)'은 앞서 7월 19일 출간된 안철수의 생각과 함께 저자에 대한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효과를 거뒀다.

지난달 25일 제주지역경선을 시작으로 16일까지 13개 지역을 돌며 치러진 경선에서 모두 1위를 하면서 문 후보는 명실공히 제 1야당의 대통령 후보로서 우뚝섰다.

경선과정에서 모바일투표 시스템 오류, 당 지도부와 담합 의혹제기 등으로 잡음도 많았지만 민주당이 15일 당의 인사, 재무 등 운영에 관한 전권을 위임하고 대통령 후보 위주로 쇄신작업을 하기로 의결하면서 문 후보는 이제 민주당을 명실상부하게 대표하면서 안 원장이나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맞서게 됐다.

아울러 경선에서 함께 경쟁한 정세균, 김두관, 손학규 후보와 시민사회진영의 인사들, 재계,노동계,학계, 문화예술계 등 인사들을 아우르는 포용적 선대위를 꾸려 이 '용광로'로 대선 본선에 나서는 출발선상에 섰다.


cunja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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