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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유엔참전국⑯] 격전지의 최전선에는 ‘프랑스’가 있었다

6·25전쟁의 흐름을 바꾼 지평리전투

(부산=뉴스1) 송보현 기자 | 2023-07-01 06:00 송고
편집자주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유엔 22개국에서 195만7733명이 참전했다. 참전용사들의 용기와 활약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다. <뉴스1>은 유엔평화기념관과 함께 올해 정전협정 70주년을 기념해 한달에 한번 총 21회에 걸친 ‘이달의 유엔참전국’ 연재를 통해 유엔참전국과 참전용사의 활약상을 조명하고 기억하고자 한다.
프랑스군 부대 지휘관인 몽클라르 대대장(왼쪽)이 부대를 방문한 맥아더 장군을 맞이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제공)
프랑스군 부대 지휘관인 몽클라르 대대장(왼쪽)이 부대를 방문한 맥아더 장군을 맞이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제공)

6·25전쟁의 최대 격전지에는 프랑스군이 있었다. 그들이 보여준 의지는 대한민국 존립의 원동력이 됐다.

프랑스는 세계 2차대전 이후 후유증 극복에 힘을 쏟고 있었다. 그 무렵 유엔사무총장의 전쟁 지원 요청을 받자 프랑스 내에선 적지 않은 반대 여론이 일었다. 그럼에도 프랑스 정부는 1950년 7월 22일 유엔군 참여를 공식 선언했다. 이를 기점으로 프랑스 해군 구축함 ‘라 그랑디에르’ 호가 파병돼 인천상륙작전을 포함한 여러 해상 활동에 참전했다.
같은 해 11월 부산항에 도착한 육군 지상군 부대(I’O.N.U)는 현역과 예비군 자원자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곧장 대구의 유엔군수용대로 이동해 부대정비와 현지적응 훈련을 마친 뒤 제2사단 23연대에 배속됐다. 이후 수원으로 이동한 부대는 전쟁이 끝날때까지 미 2사단에 배속돼 전투를 치른다. 

이 부대의 지휘관은 프랑스의 전쟁 영웅 랄프 몽클라르 장군(1892~1964)이었다. 예비역이었던 그는 프랑스 정부가 대대급 부대를 한국에 파병하기로 하자 이 부대를 지휘하려고 중장에서 중령으로 계급을 낮춰 현역으로 복귀했다.  

인천에 집결한 프랑스군 (유엔평화기념관 제공)
인천에 집결한 프랑스군 (유엔평화기념관 제공)

몽클라르 장군은 50년 12월 당시 생후 11개월이던 아들 롤랑이 글을 깨우친 뒤 읽으라며 보낸 편지에서 “사랑하는 아들아. 언젠가 너는 내가 (한국으로) 떠나야 했던 이유를 물을 것이다. (중략) 너와 같은 어린 한국의 아이들이 길에서, 물속에서, 진흙 속에서, 눈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버지는 여기 왔단다”고 적었다.
그는 프랑스 대대를 이끌고 지평리 전투(1951년 2월 13~15일)에서 백병전을 치르면서까지 중공군을 물리치고 진지를 지켜냈다. 이 전투는 유엔군이 대규모 중공군을 격퇴한 첫 번째 전투로 전세를 뒤집고 서울을 재탈환할 수 있었다.  

이어 춘천으로 진격해 4월 춘천과 화천, 양구지역까지 탈환했다. 중공군의 반격에 맞서 양구와 홍천 북방 가리산, 자은리 일대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기도 한 프랑스군은 중공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외국군대로 명성을 높이기도 했다.

프랑스군은 참전 32개월 동안 모두 3개 대대 3421명이 참전해 전사 262명, 부상 1008명, 실종·포로 19명 등 1289여명이 희생을 치렀다. 또한 대한민국대통령 부대표창 2회, 미국대통령 부대표창 2회, 대한민국 무공훈장 12회, 미국 무공훈장 7회 등 각종 국내·외의 훈장을 받았다.


w3to@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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