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 후 대통령의 귀감' 美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별세…향년 100세(종합)

1994년 北 전격 방문 등 한반도 정세에도 깊이 관여
퇴임 후 '카터 센터' 설립해 해비타트 등 선한 영향력

제39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향년 10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사진은 카터 전 대통령이 2012년 1월 12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로이터통신과 인터뷰할 때 모습. ⓒ 로이터=뉴스1 ⓒ News1 최종일 기자

(서울=뉴스1) 강민경 정지윤 이유진 기자 =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별세했다. 향년 100세.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카터 센터는 29일 오후 3시 45분쯤 카터가 조지아주 플레인스에 있는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졌다고 밝혔다.

1977년부터 1981년까지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을 지낸 카터는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가장 장수한 인물이다. 최근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이 간과 뇌로 전이되며 병환이 급격하게 악화해 지난해 2월부터 자택에서 호스피스 돌봄을 받고 있었다.

카터는 지난 11월 미국 대선 때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줄을 선 모습이 포착됐다. 손자인 제이슨은 대선 전 "할아버지가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후보에게 투표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카터는 당시 "내 100번째 생일도 기쁘지만 해리스에게 투표해 정말 기쁘다"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칩 카터는 "아버지는 나뿐 아니라 평화·인권·박애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웅이었다"며 그의 죽음을 기렸다. 플레인스에서 가족 단위의 장례식이 끝난 후 공식 추모 행사는 애틀랜타와 워싱턴DC에서 엄수된다. 국장(國葬) 일정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카터 센터는 덧붙였다.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이 워싱턴DC의 백악관에서 TV연설을 준비하고 있다. 1977.02.02 ⓒ 로이터=뉴스1 ⓒ News1 정지윤 기자

중동 외교 성과 올렸지만 오일쇼크에 물가 폭등으로 재선 실패

민주당 소속으로 조지아 주지사를 지낸 카터는 워싱턴에서는 아웃사이더였으나 1976년 대선 당시 "나는 결코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내걸며 당선됐다.

백악관에 입성하고 나서는 중동 문제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성과는 1978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평화 협상 결과물인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다.

당시 카터는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를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 불러 대화를 중재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나이반도에서 철수했고 1979년 이집트는 아랍 국가 최초로 이스라엘과 수교했다.

소련 등 공산권 국가를 대상으로도 인권 개선을 압박하는 등 다양한 활약을 펼쳤으나 카터는 다음 대선에서 공화당 소속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이는 1979년 '오일 쇼크' 여파로 물가 상승률이 두 자릿수로 치솟고 이자율이 20%를 넘는 데다 휘발윳값이 천정부지로 오른 영향으로 풀이됐다. 1979년 이슬람 혁명 당시 이란 내 시위자 3000여명이 테헤란에서 미 대사관에 침입해 인질극을 벌인 미국 내 이란 대사관 인질 사건 역시 그의 재선 실패에 영향을 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미 카터(99) 미국 전 대통령이 28일(현지시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진행된 부인 로잘린 여사의 추모 예배에 모습을 드러냈다. 카터 전 대통령과 77년 평생을 함께한 로잘린 여사는 지난 19일 별세했다. ⓒ 로이터=뉴스1 ⓒ News1 이유진 기자

퇴임 후 활발한 자선활동 하며 노벨평화상 받아…재임 시보다 더 큰 인기

퇴임 후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재임 시절보다 인기를 끌며 '대통령보다 나은 전직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그의 퇴임 후 행보가 차기 지도자들에게 귀감이 됐다고 평가했다.

1980년 재선에 실패했지만 퇴임 이후 1982년 부인 로잘린 여사와 함께 고향인 조지아주 플레인스 목장으로 돌아가 카터 센터를 설립, 40여 년을 인권 문제에 앞장서고 봉사활동을 하며 전 세계의 존경을 받았다.

특히 비정부기구 '카터 센터'를 설립해 지구촌 곳곳의 분쟁 해결을 위해 민간외교 활동과 분쟁 중재, 인권 보호, 보건복지 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세계 각국 빈민에게 집을 지어주는 '국제 해비타트 운동(사랑의 집 짓기)'은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어모을 정도로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같은 활발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카터 전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노벨위원회는 국제 갈등의 평화적 해결책을 모색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증진하기 위해 그가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평가했다.

제39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향년 10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사진은 카터 전 대통령이 1977년 8월 15일 백악관에서 닉슨 행정부에서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맡았던 헨리 키신저와 오찬을 함께 하는 모습. ⓒ 로이터=뉴스1 ⓒ News1 최종일 기자

北 김일성과 회담…박정희 시절 주한미군 철수 추진하기도

카터 전 대통령은 한반도와의 인연도 깊다. 특히 퇴임 후 북한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통해 북핵 위기 중재에 나서는 등 한반도 정세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그는 1994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김일성 사망 14일 전 북한을 전격 방문했다. 당시 그가 사태 완화에 도움을 줬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었으나 북한의 핵 개발에 시간을 벌어줬다는 비판도 받았다.

카터는 박정희 군사정권 당시 한국의 인권 상황을 문제 삼으며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공약하기도 했다. 그는 취임 직후 박정희 대통령과의 갈등 속에 주한미군 3400명을 철수했지만 미 의회와 합참의 반대로 그 이상의 철군은 실행하지 못했다.

1978년 카터 부부가 워싱턴 D.C. 의회 도서관에서 열린 행사에 참여한 모습. 1978.12.13. ⓒ 로이터=뉴스1

한편 카터는 지난해 11월 96세를 일기로 별세한 아내 로절린 여사와의 금슬로도 유명하다.

두 사람은 1946년 결혼해 77년을 함께해 역대 미국의 최장수 대통령 부부라는 기록을 세웠다. 카터 부부는 슬하에 자녀 4명과 손주 11명, 증손주 14명을 두는 등 대가족을 이뤘다.

지난해 11월 로절린 여사의 추모 예배에서 카터는 "당신을 볼 때마다 나는 다시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의 신혼 시절 편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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