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대남 구호물자로 쌀·포목·의약품·시멘트 보내 [역사&오늘]

9월 29일, 북한의 대남 수해구호물자 지원

"1984년 북한 적십자사 수재구호물자 인수(시멘트)" . 이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출처: e영상역사관)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84년 9월 29일, 폭우로 인해 큰 수해를 입은 남한을 지원하기 위한 북한의 수재 물자가 남측에 전달됐다. 북한의 허세가 다분히 섞인 구호품 제공 선전을 남측이 역이용한 결과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북한의 대남 수해구호물자 제안은 표면적으로는 인도주의적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었지만, 속사정은 복잡했다. 북한은 1983년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인해 경색된 남북 관계를 개선하고, 국제사회에 북한의 인도주의적인 면모를 과시하고, 남한 사회 내에 대북 동정 여론을 조성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북한은 남한이 당연히 북측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북한의 경제 사정으로 보아 남한에 구호물자를 보낼 형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남한은 북한의 제의를 수용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남북대화의 물꼬를 터 보려는 의도도 있었고, 북한의 허세에 한번 장단을 맞춰 보자는 속셈도 있었다.

북한은 크게 당황했다. 대남 선심 공세가 자충수가 된 것이었다. 북한은 전쟁물자 비축분을 탈탈 끌어모으고 중국에까지 손을 벌려 겨우 구호물자를 마련했다. 구호물자는 쌀 5만 섬, 포목 50만 미터, 시멘트 10만 톤, 의약품 등이었다. 인천항에 도착한 북한의 구호물자는 진기한 구경거리였다. 특히 현저히 떨어지는 물자들의 품질이 큰 화젯거리였다.

남한은 북한이 보낸 구호품의 100배에 달하는 생필품과 전자제품 등을 답례로 보내 북한의 자존심을 긁었다. 그래도 북한의 수해 물자 덕분에 도움을 받은 이재민들도 있었고, 남북대화도 재개됐다. 1984년에는 남북경제회담이, 1985년에는 전후 최초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됐다. 또한 남북한 상호 예술단 방문도 이루어졌다.

남북한 관계는 1985년 10월 청사포 간첩선 침투 사건을 계기로 다시 경색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북한의 수해 물자 제공으로 인한 잠시나마의 해빙기는 사상과 이념을 떠난 협력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줬다.

acenes@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