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운명을 바꾼 처절한 사투" [역사&오늘]
8월 3일, 다부동 전투 시작
- 김정한 기자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50년 8월 3일, 북한의 파죽지세 공세에 국가 운명이 절체절명에 놓인 순간,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 보루였던 다부동(현재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전투가 시작됐다.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이 전투에서 국군은 북한군이 공격을 저지하고 대구와 부산 일대를 지켜냈다.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에서 국군은 불과 한 달 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다. 강 옆에 위치한 다부동은 지리적 특성상 대구와 부산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만약 다부동을 내주게 된다면 대구와 부산까지 함락될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국군 제1사단을 중심으로 국군 제6사단과 미군 제1기병사단이 낙동상 전선 사수에 나섰다. 아군은 약 한 달 동안 북한군 13사단, 15사단, 105전차사단 등 3개 사단을 상대로 처절한 싸움을 벌였다.
제1사단은 낙동강을 건서 남하를 시도하는 북한군을 여러 차례 격퇴했고, 제6사단은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며 버텼다. 또한 미 제1기병사단은 왜관 일대에서 역습을 전개하며 적과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여기에 유엔군이 공중 폭격을 지원하고 미군 제8군이 적절한 예비대를 투입해 큰 도움을 줬다.
8월 20일 북한군은 마침내 다부동 돌파 작전을 포기하고 유학산을 공격하던 제15사단을 영천 방면으로 철수시켰다. 이로써 8월의 다부동 위기 사태는 종결됐다. 하지만 양측 모두 큰 사상자가 나왔다. 아군에서는 약 1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북한군은 2만 4000여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수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바쳐 승리를 거둔 다부동 전투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꾼 중요한 사건이다. 국군은 이 전투를 계기로 수세에 몰렸던 전황을 역전시키고, 이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전투를 통해 국군의 사기는 높아졌고, 국제사회의 지원도 이끌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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