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적 엔저에 탈일본하는 외국인 노동자들…국력저하의 단면[딥포커스]

"이젠 생활비도 부족" 필리핀 가사도우미들, 캐나다·호주로 이동
"이렇게 엔저가 진행된다는 것은 日 체력 떨어졌다는 것" 기업들도 우려

엔달러 환율이 154엔 중반까지 치솟으며 심리적 저항선인 155엔을 눈앞에 둔 16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엔화와 달러를 정리하고 있다. 엔화 가치는 1990년 6월 이후 34년 만에 최저를 다시 갈아 치웠다. 2024.4.16/뉴스1 ⓒ News1 김성진 기자

(서울=뉴스1) 권진영 기자 = "연봉 300만 엔(약 2635만 원)으로 생활 가능하냐"

일본 채용회사들이 외국인 취업준비생들에게 받는 질문이다. 니혼게이자이(닛케이) 신문에 따르면 10년 전만 해도 아시아권 국가들에서 일본 취업은 자국 내 취업보다 돈을 더 벌 수 있는 기회의 문이었지만 최근에는 명성을 잃고 있다.

◇日 취업할 바에야 캐나다·호주로

"매년 엔도 조금씩 값이 내려서 좀 힘들어요. 이제는 생활비가 부족해요"

2년 전부터 일본에서 가사 도우미로 일하고 있는 필리핀 출신 헤이젤(29)은 TBS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월급은 약 20만 엔(약 176만 원). 여기서 5만 엔(약 44만 원)을 떼어 필리핀 가족 살림살이에 보태고 있다. 하지만 끝 모를 엔저 탓에 최근에는 같은 금액의 돈을 보내려면 5만엔으로는 소용도 없다.

사정은 헤이젤 회사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그가 속한 가사 대행사의 스태프 약 120명은 모두 필리핀 출신인데, 최근에는 엔저로 퇴사하는 이까지 나타났다.

회사 대표는 "캐나다나 호주 등 화폐가치가 더 높은 곳으로 전직하기 위해 (일본에서) 일을 그만두는 사람도 드문드문 나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일본으로 들어오는 이들의 부담은 줄었다. 도쿄에서 중국인 유학생들을 상대로 입시 학원을 운영하는 한 강사는 마이니치신문에 "엔저가 이어지면 유학 비용도 더 저렴해져 보다 많은 유학생들이 올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아직도 중국인 유학생은 빈곤하다고 생각하는 일본인이 많다"고 꼬집었다. 이어 예전에는 수익률이 높은 아르바이트를 위해 수단 삼아 유학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상하이 기준 월수입이 일본을 앞질러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고 설명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최근 데이터에 따르면 미국 달러 환산의 일본의 평균 임금은 38개국 중 25위에 그친다. 1990년대 초, 버블 붕괴 후 임금 침체로 순위가 크게 밀렸다.

20년 이상 임금이 정체된 상태에서 엔화 가치가 크게 하락하다보니 일본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에게 '돈을 벌러 가는 나라'가 아니다.

삼성전자가 일본 도쿄 시부야에서 '갤럭시 Z 플립5' 옥외광고를 진행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2023.8.27/뉴스1

◇멈추지 않는 엔저, 국력까지 떨어뜨리나

사상 최저 수준이라는 엔저를 막기 위해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일은)이 외환시장에 개입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효과는 일시적이었다.

멈추지 않는 엔저는 한때 '수출과 관광 수입 찬스'라는 낙관에서 이제는 '국력 저하'라는 비관으로 바뀐 모양새다.

비관적인 전망은 일본 기업 결산 회견에서도 빈번히 기업가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주식회사 마루베니의 가키노키 마스미 회장은 이달 초 "환율은 국력을 구현한 것과도 같다"며 "역시 이렇게까지 엔저가 진행된다는 것은 일본의 체력이 떨어졌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쓰비시상사의 나카니시 가쓰야 사장도 "엔은 국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엔저가 진행되면 국력이 약해지는 측면이 있다"고 우려했다.

국내총생산(GDP)은 일본의 국력 저하를 보여주는 대표적 지표다. 중국에 이어 지난해에는 독일에까지 뒤지며 전 세계 4위를 기록했다. 내년에는 인도보다도 낮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버블 경제'와 같은 호시절의 일본을 기억하는 시민들에게는 이런 일본의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한 시민은 "경제 대국 일본은 당연한 얘기다. 4위는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1인당 GDP로 따지면 상황은 더 나빠진다. 이미 주요 7개국(G7) 중에서는 꼴찌, 세계에서는 34위까지 떨어졌다. 단순한 순위 하락도 문제지만, 국가의 사정과 국민 개인의 경제 사정에 괴리가 커지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실제로 일본 노동자의 실질임금 수준은 지난달 기준 24개월 연속 내리막을 걸었다. 과거 최장 기록이다.

닛케이는 "엔저는 수출에 강한 대기업의 실적을 끌어올려 임금 인상에 한몫한 면이 있지만, 식료품과 에너지원의 많은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일본에 물가 상승의 우려를 남겼다"고 논평했다.

히데오 하야카와 전 일은 이사는 대기업이 해외에서 돈을 벌어도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는 구조와 디지털 적자가 엔저가 멈추지 않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그는 "일본 기업이 해외 현지 법인에서 번 수익을 일본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쪽에 모아두고 있다"며 장부상으로만 흑자로 잡힐 뿐, 일본으로 돈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고 짚었다.

동시에 디지털 관련 서비스에서 난 적자는 놀라울 정도라며 "클라우드, 인공지능(AI) 사용료 등" 디지털 관련 적자가 맹렬한 기세로 불어나고 있다고 염려했다.

realkwo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