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 1인자 암살 배후 '모사드'엔 전설의 스파이가 있었다[피플in포커스]

이집트서 유대인 탈출 도와…기업가로 위장해 시리아 침투
골란고원 첩보로 이스라엘 승전 기여…발각돼 교수형 당해

이스라엘 '전설의 스파이' 엘리 코헨. ⓒ AFP=뉴스1 ⓒ News1 박재하 기자

(서울=뉴스1) 박재하 기자 = 하마스 정치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가 이란에서 암살당하자 그 배후로 지목된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에 관심이 쏠린다.

특히 현재까지 스파이계의 전설로 꼽히는 모사드 최고의 요원 엘리 코헨의 활약상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코헨의 본명은 엘리야후 벤 샤울 코헨으로 1924년 이집트 알렉스드리아에서 태어난 중동·북아프리카 출신의 '미즈라히' 유대인이다.

코헨의 부모와 형제들은 1949년 이스라엘로 이주했지만 코헨은 학업을 마치고 이집트에서 유대인들의 해외 이주와 시온주의(유대 국가 재건 운동) 활동을 돕기 위해 잔류했다.

그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정보원으로 활동하며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몰래 탈출시키는 작전을 지원해 왔다. 또 이집트와 서방의 불화 조장을 위한 활동을 전담하는 비밀조직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코헨은 그의 활동을 의심한 이집트 경찰에 체포됐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후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이 터지면서 이집트 당국이 포위망을 좁혀왔지만 결국 물증을 확보하지 못해 코헨을 추방했다.

이스라엘로 이주한 코헨은 군의 방첩부서에 입대했다 일이 따분하다고 느껴 모사드전직을 신청했지만 탈락했다. 이후 그는 텔아비브의 한 보험회사에서 근무하다 시리아에 보낼 요원을 물색하던 모사드에 발탁됐다.

혹독한 훈련을 받은 코헨은 카말 아민 타베트라는 이름의 부유하고 바람기 있는 시리아 사업가로 위장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동했다.

6일(현지시간) 이스라엘의 전설적인 스파이 엘리 코헨의 아내 나디아가 인터뷰 도중 코헨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코헨은 시리아에서 비밀요원으로 활동하다 발각돼 1965년 5월 18일 사형됐다. 2019.10.06/ ⓒ 로이터=뉴스1 ⓒ News1 박재하 기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코헨은 수시로 파티를 열고 시리아 거주민 공동체와 교류하며 시리아인들의 환심을 샀다.

이를 통해 아르헨티나 주재 시리아 대사관 무관 등과 인연이 닿은 코헨은 시리아 입국을 위한 추천서를 받는 데 성공해 1962년 마침내 시리아로 침투했다.

시리아에 들어간 코헨은 성공한 비즈니스맨 행세를 하며 상류층에 진입해 고위 군부 인사와 집권 바트당 지도부 등과 친분을 쌓았다. 코헨은 이러한 네트워크를 통해 시리아의 핵심 정보에도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이렇게 얻은 최고급 정보 중에는 시리아군의 무기, 골란고원 내 시리아군 배치도와 요새의 위치 등도 있었다. 코헨은 알아낸 정보를 이스라엘에 무선과 비밀편지 등으로 전달했고, 때로는 이스라엘로 돌아가 직접 이를 알리기도 했다.

특히 코헨은 골란고원을 방문했을 당시 일선에서 일하는 병사들에게 그늘을 제공하자고 제안해 유칼립투스 나무를 시리아군 진지가 숨겨진 곳에 심게 한 뒤 이를 이스라엘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이 나무들은 훗날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의 표적으로 활용됐다. 코헨의 맹활약 덕에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군사 현황을 훤히 꿰뚫고 있었으며 이스라엘군은 제3차 중동전쟁에서 어렵지 않게 골란고원을 점령하게 된다.

심지어 코헨과 가까운 사이였던 아민 알하피즈 장군이 1963년 바트당 쿠데타에 성공하자 코헨을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하는 방안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확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꼬리가 너무 길면 잡히는 법. 코헨은 첩보 활동에 상당한 재능을 보였지만 모사드 측 경고를 무시한 채 너무 자주 또는 항상 같은 시간에 무전을 보내는 부주의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0일(현지시간) 시리아와의 국경지대인 골란고원에서 이스라엘의 탱크부대가 시리아 공격명령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다. ⓒ AFP=뉴스1 ⓒ News1 우동명 기자

이스라엘과 긴장이 고조되면서 시리아에서도 방첩 활동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시리아는 옛 소련의 협조 요청을 받아 전파 탐지에 나섰다. 결국 소련과 시리아 정보당국은 1965년 1월 24일 자택에서 이스라엘에 최신 정보를 전송하던 코헨을 발각했다.

코헨은 군정보국으로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한 뒤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스라엘은 코헨을 구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에는 물론 소련에까지 지원을 요청하며 코헨의 감형을 추진했다. 하지만 시리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코헨은 1965년 5월 18일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시내 마르제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코헨의 유족은 이후 시리아 측에 유해 송환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프랑스와 독일, 유엔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유해를 돌려달라고 거듭 요청했지만 계속 묵살됐다.

코헨 사망 40주기에 아리엘 샤론 당시 총리는 "혼자 사자굴에 들어가 전설이 된 투사"라고 고인을 평가했다. 코헨의 활약상은 2019년 그의 간첩 활동을 소재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더 스파이'(The Spy)로 소개된 바 있다.

이스라엘은 코헨을 국민영웅으로 추대하며 일부 도로와 마을 등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기도 했다.

jaeha67@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