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는 이미 승리를 가져갔다

[NYT 터닝 포인트 2024]

편집자주 ...'사실 앞에 겸손한 정통 민영 뉴스통신' 뉴스1이 뉴욕타임스(NYT)와 함께 펴내는 '뉴욕타임스 터닝 포인트 2024'가 발간됐다. '터닝 포인트'는 전 세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별 '전환점'을 짚어 독자 스스로 미래를 판단하고 대비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지침서다

ⓒ 뉴스1 (출처 = NYT 터닝 포인트 2024)

야만적 행위가 혁명의 논리를 가질 때가 가장 위험하다.

(서울=뉴스1) 이유진 기자 = 2014년, 중동의 한가운데에 새로운 국가가 탄생했다. 수도와 정부, 군대를 갖춘 이슬람 국가는 인접 요르단이나 이스라엘보다 더 많은 인구 1200만 명에 달하는 국민을 보유했다. 그리고 이 국가는 학살과 야만, 광신적 폭력을 일삼아 문명 세계 전체의 적대감을 샀다.

이같은 보편적 적대감으로 이슬람국가(Islamic State‧ISIS‧다에시)가 어떻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당시 나는 이들을 대중적인 혐오와 외국의 개입에 직면했음에도 몇 세대에 걸쳐 러시아를 통치하기 위해 살아남았던 무자비한 혁명 테러리스트 집단인 볼셰비키에 비유했다.

하지만 더 그럴듯한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IS는 온건함조차 거부하고 서방 세력과의 직접대결을 추구하며 국제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이들은 일시적인 신병 모집 붐을 일으켰으나, 곧이어 급격히 몰락했다. 국제사회의 다극화 속에서 미국의 힘이 약해졌음에도, IS의 야만성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미국은 무력 소탕 작전을 펼쳐야 했다.

이러한 전례는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위기와 맞닿아 있다. 하마스가 무고한 이스라엘인에게 저지른 잔학 행위, 성적 가학 행위, 신체 절단, 잔인함을 즐기는 현재의 모습은 IS의 만행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을 통해 하마스의 전략에 의문이 들게 한다.

일각에서 이스라엘과 인접 중동 국가들 간 평화를 깨뜨리기 위해 이스라엘의 대응을 이끌어낼 유일한 방법이 잔혹 행위밖에 없다는 전략에 따라, 이같은 하마스의 잔혹적인 행위가 계산됐을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다.

아니면 하마스에게 정상적인 전략적 계획이 전혀 없었다는 증거였을까? 어쩌면 IS의 잔혹함과 일치하면서 그 정권의 자멸적인 어리석음까지 일치할 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디 애틀랜틱(The Atlantic)’의 야이르 로젠버그가 적었 듯이, 잔혹한 학살은 "전략이 아니라 가학에 뿌리를 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가 이러한 보기 중 하나를 꼭 선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급진적 행위는 이데올로기적 동기를 부여받은 사디스트와 전략적 사고를 가진 도박꾼이 조금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도 결과적으로 같은 계획에 수렴하는 등 다원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단적 폭력을 전략으로 보는 또 다른 시각도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정책과 사우디-이스라엘의 관계 완화에 미치는 잠재적 영향보다도 더 큰 의미를 지니는 쪽이다.

그렇다. 의도적인 극단적 행위는 처음엔 도덕적으로 궁지에 몰아넣고 이후엔 스스로를 완전히 파괴시키는 IS 시나리오와 같은 위험이 있다. 하마스가 지금 실행하고 있는 시나리오는 바로 그런 위험이다. 하마스는 가자지구에서 권력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서방 좌파와 아랍 세계의 일부로부터 IS가 누리지도, 추구하지도 않았던 어느 정도의 정당성과 호의를 누리고 있다. 그리고 하마스가 보여준 잔혹 행위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더욱 입증하는 것과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선을 계속 넘어 문명 세계를 떠나고 많은 동맹국들이 당신과 함께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스라엘 남부를 도살장으로 만들고 그 이후 IS처럼 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대신 대부분의 동조자가 평소처럼 구석 지대에서 일부는 변명을 하며 폭력을 경시하고, 다른 일부는 대의의 영광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다미르 마루시크가 쓴 문제의 에세이처럼, 하마스는 전에 없던 '혁명적 정당성'을 획득한 셈이다. 동조자들은 급진적인 부도덕주의를 받아들였고, 이제 그들이 자신의 도덕성을 재확립하거나, 변명하거나 포용하거나,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만) 먼저 변명하고 나서 포용하도록 강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혁명보단 덜 극단적으로 정치 체제를 무너뜨린다고 그는 분석한다. 그리고 이는 향후 동맹국들이 빠져나갈 길을 완전히 봉쇄하게 된다. 이처럼 어둠 속 끝까지 동조하면 추후 상황이 나빠지는 건 더욱 쉬워지고, 좋아지는 건 더욱 어려워지기만 한다.

그렇다면 하마스는 이와 같은 목표를 달성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현재 하마스는 서방 정치권 내에서 이전에 누렸던 어느 정도의 정당성을 분명히 잃었고, 유럽 지도자들은 물론 친이스라엘 성향의 미국 중도 좌파를 겁에 질리게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소탕하려는 목표에 지정학적으로 노출된 채로 남게 됐다.

그러나 IS만큼 위험에 노출된 것은 아니다. 하마스 세력은 무슬림 세계 전역에서 대중의 지지를 유지하거나 확대했으며,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과 같은 강력한 인물이 그들을 지지하고, 서방 도시의 시위대를 선동하고 반유대주의가 급증하도록 만들었다. 아울러 운동가-학계 복합체 내에서 여전히 다양한 형태의 동정심을 유지하고 있다.

하마스는 이 모든 것을 잠정적인 승리로 간주해야만 한다. 이 승리가 하마스의 군사적, 정치적 몰락을 동반했을 지라도, 또한 어쩌면 그것이 가치가 없는 쿠데타에 그쳤을 지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현재로선 하마스는 극단적인 폭력 행위로 얻을 수 있는 어두운 전략적 승리의 형태를 거뒀다고 볼 수 있다.

필자 로스 더세트 ⓒ 뉴스1 (출처 = NYT 터닝 포인트 2024)

필자: 로스 더세트. 미국의 정치 분석가, 블로거, 작가, 뉴욕타임스(NYT)의 칼럼니스트다. 미국 기독교의 상황과 현대 사회의 퇴폐성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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