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역사 크루즈] 바다 민족의 영욕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두 문명 사이의 땅

(서울=뉴스1)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중동 지역에는 역사적으로 두 개의 문명의 축이 있었다. 하나가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서 발호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개의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으로, 두 개의 강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 강이다.

다른 하나는 나일강 유역에 펼쳐진 이집트 문명이다. 두 문명은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했다. 중동사를 보면 두 문명은 서로 멀찍이 떨어져 남남으로 살아가기도 하고, 서로 팽창하면서 격렬하게 대립하기도 했다.

워낙 거대한 문명세계이다 보니 남남으로 지낼 때도 교류는 끊이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은 척박하고 소외된 땅이었지만, 이집트에서 메소포타미아로 가기 위해서는 혹은 그 반대의 경우에도 반드시 지나야 하는 통로였다. 이 지역의 척박함이 이런 지정학적 위치를 더 부추겼는데, 그나마 안전하고 편안한 길이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사료에 해안길이라고 나오는 이 길이 지금 포연에 뒤덮인 가자지구에서 야파를 지나 이스라엘을 거쳐 레바논과 시리아를 통과하는 길이었다.

이집트가 팽창하든, 이집트를 정복하러 가든 이 길과 도시들은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이었다. 아시리아 군대, 페르시아의 정복왕 다리우스의 군대도 이 길을 지났다. 알렉산드로스는 가자를 공격하다가 꽤 심한 부상을 입었다. 카이사르, 사자왕 리차드, 나폴레옹도 이 도로상의 도시에서 싸웠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야기하자면 해안길 지역이 다 척박한 곳은 아니었다. 지중해의 진주라고 불렸던 레바논 지역은 풍요한 땅이었다. 특히 목재와 석재 자원은 전 중동지역에서 독보적이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나 위명에 비해 은근히 부족한 자원이 많았다. 특히 절실했던 것이 목재와 석재였다. 명성이 자자한 레바논의 백향목은 이 지역에 세워진 고귀한 신전이나 선박 제조에 꼭 필요한 자원이었다.

레바논은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고대에도 해상무역은 의외로 활발했다. 레바논에 터를 잡고, 인류 최초의 무역상으로 활약한 상인국가가 페니키아다. 훗날 아시리아가 부와 자원을 탐내 레바논으로 침공해 오자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를 건너 북아프리카로 이주해 카르타고를 세웠다.

척박한 곳은 지금의 이스라엘과 요르단, 시나이반도로 이어지는 지역이다. 거대 문명 사이의 이동로이면서 척박한 땅이다 보니, 전쟁 때가 아니면 대국들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작은 부족, 소수 민족, 혹은 갈 곳이 없는 길 잃은 민족들이 이 지역으로 흘러들었다.

따지고 보면 고대 이스라엘 왕국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셈족 집단인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인이라고 불린 팔레스타인의 선주민들이 세운 도시를 정복하고 세운 나라였다. 히브리인이란 명칭은 국적이 없는 용병, 유랑집단을 의미하는 하바루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추측하는데, 처음부터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 셈족 계열의 잡다한 혼성집단이었다. 가나안 침공 이후에도 혼혈이 상당히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어떤 혼합도 이겨내는 강력한 두 개의 특징이 있었다. 하나가 고대 세계에서는 보기 힘든 강력한 신앙으로 무장한 유일신교였고, 하나가 대단히 강력한 유전학적 요소였다.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인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존재인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신전과 피라미드를 포함한 자신의 무덤을 엄청난 조각과 상형문자로 채웠다. 역사가로서 아쉬운 부분은 그 어마어마한 상형문자 기록이 반복되는 뻔한 신화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좀 더 사실적이고 역사적인 기록으로 채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반복되는 테마 중에 역사적인 소재도 있는데, 원정에서 사로잡아온 포로들을 과시하는 그림이다. 목에 밧줄을 걸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포로들의 모습이 신전이나 무덤 벽면 한구석 어딘가에 하나씩은 있다.

이집트 조각가는 이 포로들에 신체적 특성을 부여해서 그들의 종족을 표시하려고 했다. 유대인의 상징은 크고 두드러지는 매부리코였다. 이집트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역의 기념비에서도 유대인의 특징은 동일하게 묘사된다. 적어도 가나안 정복은 이런 유전적인 승리로 마무리된 것이 분명하다.

◇ 바다 민족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정복지를 조금씩 늘려나갈 때, 이들의 정복사업을 훼방하는 강력한 족속이 홀연히 등장했다. 한글 성경에는 블레셋인이라고 표현되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다. 지금의 팔레스타인이란 지명은 이들에게서 유래했다.

매부리코의 히브리인과 함께 팔레스타인인들도 인상적으로 등장한다. 끝이 여러 갈래로 갈라진 특이한 모자를 쓰고 있다. 이집트나 다른 지역의 기록에 이들은 '바다 민족'이란 명칭으로 등장한다. 해적 떼 같은 느낌이 들지만, 바다민족은 꽤 강력했다.

한때 이집트까지 위협하던 무적의 히타이트 왕국이 허무하게 무너진 이유 중 하나가 바다민족의 침입이었다. 바다민족은 이집트도 침공했다. 기원전 1150년 람세스 3세는 대대적인 군사개혁을 단행하고 이들과 싸워 간신히 이집트를 지킬 수 있었다.

바다 민족의 정체는 오랫동안 미스터리였다. 그러다가 크레타섬의 벽화에서 바다 민족과 같은 모자를 쓴 그림을 발견했다. 이 때문에 이들이 크레타에서 건너왔다는 설이 퍼졌지만 이들이 전적으로 크레타인인지, 크레타에도 잠시 살았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필자의 개인적인 추정으로는 바다 민족이 동일한 혹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후기 청동기 시대, 도시들이 서로 경쟁하고, 정복하는 자와 정복당하는 자, 땅을 차지한 자와 밀려나는 자가 발생하고 있던 시기에 에게해의 여러 집단들이 뭉치고 이동하면서 중동지역으로 유입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그리스 계통의 유럽인들이었다면 처음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는 히브리인을 포함해서 셈계의 주민들, 아랍인들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용모를 지녔을 것이다. 종교적 요인뿐 아니라 이런 두드러진 인종적 차이도 고대인들에겐 부러움과 적개심, 이질감을 고조시키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요인은 역시 현실적인 것이었다. 힘이 약했던 히브리인들은 처음에는 산악지대를 점거하고 호시탐탐 이 지역에서는 제일 괜찮은 해안평야 지대를 노렸다. 그런데 이곳을 바다 민족이 들어와 점거해 버린 것이다. 게다가 문명적으로 낙후했던 히브리인들이 아직 청동기에 머무르고 있을 때, 바다민족들이 먼저 철기를 도입했다. 히브리인들은 바다민족의 철제 전차를 보면서 평원 전투를 감행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지기까지 두 민족은 길고 처절한 대결을 벌여야 했다.

◇ 3000년의 악연일까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참혹한 비극으로 진행되고 있다. 양측 다 선을 넘었다. 이젠 누가 원인 제공자이냐를 따지는 것조차 무의미해졌다. 궁극적인 해법을 운운하는 것도 사치 같다. 피를 보면 반드시 선을 넘고, 선을 넘으면 해법이 안 보이는 것이 전쟁의 보편적 속성이다. 역사에서 수많은 사례를 보면서도 같은 잘못이 무수히 반복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이 생길 때마다 이 땅의 원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진다. 필자는 원칙적으로 선주민 논쟁, 소유권 논쟁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도시국가가 난립하던 시기, 우리가 붙이는 인종의 규모도 지극히 작고 훨씬 더 많은 종족들이 살고 있던 3000~4000년의 기준을 적용한다면 현재 전 세계의 지도를 갈기갈기 찢고 국가와 거주민을 다 해체해야 할 것이다.

3000년 전에 벌어진 사건은 과거의 사건일 뿐이다. 현재의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이 그들의 직계 후손만으로 구성되지도 않았다. 우리가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부분은 현실적인 해법이다. 물론 3000년 전은 잊고,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부터로 한정해도 양측이 만족할 만한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다 보니 3000년 전의 역사까지 소환하게 되고 합리적 해법은 더 어렵게 된다. 인간사에 답이 나오지 않는 난제가 한둘이 아니지만 팔레스타인 문제는 정말 어렵고, 불가사의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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