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죄로 20년형 받고 잠적한 수리남 전 대통령, 79세로 사망
1980년 쿠데타로 집권…재임시 포퓰리즘 정책으로 경제난 초래
1982년 15명 살인 혐의로 징역 20년 선고받아…판결 확정되자 잠적
- 김지완 기자
(서울=뉴스1) 김지완 기자 = 데시 바우테르서 수리남 전 대통령이 살인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후 수감을 피하기 위해 도피한 지 1년 만에 사망했다.
AP 통신,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25일(현지시간) 수리남 정부는 바우테르서가 24일 79세 나이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수리남 정부는 알버트 람딘 외무장관이 가족과 자체 조사를 통해 바우테르서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다만 그의 사망 장소나 국가,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경찰청장과 법무부 장관을 지내면서 바우테르서의 살인 혐의를 수사한 찬 산토키 수리남 대통령은 유족에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성명을 통해 국민들에게 "품위 있고 침착하게 행동하고, 평화 질서를 유지하며, 이 특별한 날의 정신에 따라 기도할 것"을 촉구했다.
1945년에 태어난 바우테르서는 1968년 당시 수리남을 지배하던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그는 그곳에서 왕립군사학교를 졸업하고 네덜란드군에서 복무하다가 1975년 11월 수리남이 독립하기 2주 전에 귀국했다. 이후 헨리 아론 초대 총리가 수리남 군대의 노조 결성을 금지하자 바우테르서를 필두로 한 16명의 젊은 군인들은 1980년 2월 25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다.
그는 초기에 민주적 개혁을 약속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다. 이에 군사 정권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졌고, 1982년 12월 8일 언론인, 변호사, 군인 및 대학교수 등 15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네덜란드는 원조 제공을 중단했다. 1986년에는 바우테르서의 경호원이었던 로니 브륀스베이크가 1986년 무장 반란을 일으켜 6년간 내전이 이어졌다.
바우테르서는 국제적으로 고립됐고 국내 지지 기반도 부족해 결국 1987년 11월 자유선거 실시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가 세운 국민민주당은 총선에서 의회 51석 중 3석만 확보했다. 다만 군 총사령관으로서 바우테르서는 영향력을 계속 행사했고 1990년 2차 쿠데타를 일으켜 1992년까지 집권했다. 그는 1993년 군을 떠나 전업 정치인과 사업가로 활동하면서 정계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바우테르서는 201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그는 쿠데타를 일으킨 2월 25일을 공휴일로 지정했고 1982년 살인 사건과 쿠데타에 관여한 인사들을 정부 고위직에 임명했다. 또 우고 차베스 당시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사회주의 정책에 감명받아 공공 지원 주택을 건설하고, 사회 복지 혜택과 정부 연금을 늘렸다. 덕분에 그는 2015년 재선에 성공했지만, 이런 정책으로 인해 정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극심한 물가 상승을 초래했보다. 2016년 수리남 달러는 1년 만에 가치가 절반 이상 하락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제난으로 인해 그의 인기가 떨어지자 1982년 살인 사건 재판을 담당한 판사를 협박하거나 그 사건을 언급한 고등학교 교과서를 금지했다. 또 수리남의 경제 문제를 내각 장관들의 탓으로 돌리고 그들을 수시로 해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0년 5월 총선에서 그가 이끌던 국민민주당이 패배했고 의회는 새 대통령으로 찬 산토키를, 부통령으로 로니 브륀스베이크를 선출해 정권이 교체됐다.
한편 2007년 수리남의 군사법원은 바우테르서와 24명에 대해 1982년 살인 혐의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검찰은 그를 이 사건을 주도한 사람으로 지목했지만, 그는 살해 현장에 없었다고 주장하면서도 육군 지휘관으로서 '정치적 책임'은 수용한다고 말했다. 2017년 검찰은 그에 징역 20년을 구형했고 법원은 2019년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바우테르서는 이에 항소했지만 지난해 12월 수리남 법원이 기존 형량을 확정하자 그는 종적을 감췄다.
gwki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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