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난 아르헨, 페론주의 버리고 극우 선택…"국가 재건 시작"(종합2보)

과격한 언행·극단적 공약으로 트럼프·보우소나루와 비교
치솟는 물가·기성 정치권에 반발한 젊은 층 지지로 당선

19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승리한 하비에르 밀레이 후보가 대통령 수락 연설을 하면서 기뻐하고 있다. ⓒ 로이터=뉴스1 ⓒ News1 박형기 기자

(서울=뉴스1) 김예슬 신기림 기자 = 남미 2대 경제국 아르헨티나에서 극우 자유주의 성향의 하비에르 밀레이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중남미의 핑크타이드(좌파 정부 연쇄 집권)를 이끌었던 아르헨티나에 우파 정권이 들어선 데는 기존 정치권과 인플레이션에 염증을 느낀 젊은 층의 지지가 크게 작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19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대선 결선 개표가 90% 가까이 진행된 가운데 밀레이는 득표율 56%를 기록해 중도좌파 경제장관인 세리히오 마사 후보의 득표율 44%를 앞서 아르헨티나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이 확정적이다.

밀레이는 승리를 거둔 뒤 "오늘 아르헨티나의 재건이 시작된다. 아르헨티나의 쇠퇴는 끝나기 시작한다"며 "오늘은 대다수가 고통을 겪고, 일부에게만 혜택을 주는 국가의 빈곤 모델이 종료되는 날"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자유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여야만 해결책이 있다"며 "자유세계의 모든 국가와 협력해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다짐했다.

또 밀레이는 "우울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에는 미래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며 "자유주의와 함께라면 그 미래는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마사 후보는 이날 밤 기자회견에서 패배를 인정했다. 마사는 밀레이에게 전화를 걸어 승리를 축하하고 일선 정치에서 은퇴하겠다고 밝히며 "아르헨티나 국민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마사는 "분명히 우리가 기대했던 결과는 아니다"라며 "밀레이가 향후 4년간 아르헨티나를 이끌 대통령으로 선택됐고 그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고 덧붙였다.

19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대선 당선자 하비에르 밀레이가 개표 결과에 크게 환호하고 있다. ⓒ 로이터=뉴스1 ⓒ News1 박형기 기자

◇과격한 언행·극단적 공약으로 트럼프·보우소나루와 비교

밀레이는 53세 경제학자 출신으로 자칭 '무정부주의 자본주의자'로 통한다. 종종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와 비교된다. 과격한 언행과 극단적 선거 공약 때문이다.

초선 의원으로 소수 극우 정당 출신인 그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반감과 인플레이션을 근절하겠다는 의미로 그동안 유세현장에서 전동 전기톱을 휘둘렀다.

밀레이는 기후변화는 거짓이며, 낙태를 반대하고, 아르헨티나 페소를 미국 달러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는 극단주의자다. 또 인간의 장기를 시장에 판매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여성부를 없앨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Qué se vayan todos!!(모두 나가라!!)"고 외치며 아르헨티나 현대 정치사를 지배한 '페론주의'와 '마크리스모'로 양분된 스펙트럼 정치에 신물을 표현했다.

이날 밀레이의 당선 소식이 알려지자 그를 지지하는 수천 명의 국민들은 선거 캠프 밖에서 깃발을 흔들며 자유를 외쳤다.

흰색과 파란색으로 이뤄진 아르헨티나 국기를 걸친 나초 라라나가는 AFP통신에 "우리는 페론주의에 지쳤다"며 "밀레이는 무명이지만, 도둑보다는 미친 사람이 낫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19일(현지시간) 아르헨 대선에서 승리한 하비에르 밀레이 후보의 지지자들이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 길거리로 몰려 나와 폭죽을 터트리고 있다. ⓒ 로이터=뉴스1 ⓒ News1 박형기 기자

◇치솟는 물가·기성 정치권에 반발한 젊은 층 지지

외신들은 밀레이 후보가 지난 수십 년간 이어진 정치에서 염증을 느낀 젊은 층의 큰 지지를 얻고 있다고 봤다. 아르헨티나 유권자 3530만 명 중 25% 이상이 30세 미만인 만큼 젊은 층의 지지가 밀레이 후보의 득세를 이끈 것으로 보인다.

아르헨티나는 지난 2018년부터 6년간 이어진 경제 위기로 살인적인 물가 상승을 겪고 있다. 9월 물가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124%로, 1991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아르헨티나는 1950년대 이후 29번이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세를 지는 등 꾸준히 금융 위기를 겪어왔다.

특히 지난 2018년 외환 위기로 페소의 달러 대비 가치는 절반으로 떨어졌고, IMF로부터 570억 달러(약 73조7400억원)에 이르는 초대형 구제금융을 받았다. 당시 구제금융을 받는 대가로 정부 보조금을 삭감하고, 세금을 인상하는 등 긴축 재정을 펼치기로 했지만, 정작 선거를 앞두고 포퓰리즘 정책으로 돌아서며 경제는 다시 무너졌다.

연구 컨설팅 회사 쓰리포인트제로의 쉴라 바이커 이사는 "밀레이의 지지자들은 젊은 우파가 아닌 삶의 계획을 세우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좌절감을 느끼는 젊은이들"이라고 설명했다.

여론조사기관 오피나이아의 여론조사원 발렌틴 나벨은 "밀레이의 담론은 코로나19 이후 국가에 대한 자율성, 개인주의에 초점을 맞춰 젊은이들에게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했다.

이날 밀레이 지지 시위대에 합류한 후안 이그나시오 고메즈는 "이것이 우리 젊은이들이 원하는 변화"라며 "나는 밀레이가 두렵지 않다. 아버지가 집세를 못 내는 것이 두렵다. 아르헨티나 페소는 아무 가치가 없다"고 호소했다.

19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대선 결선 개표가 90% 가까이 진행된 가운데 하비에르 밀레이가 득표율 56%로 중도좌파 경제장관인 세리히오 마사 후보를 앞서며 당선을 확정지었다. 마사 후보의 선거 캠프 앞에 있던 지지자들이 결과를 확인하며 침통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 23.11.19 ⓒ AFP=뉴스1 ⓒ News1 김예슬 기자

◇밀레이 공약에 우려도…"국민 절반이 지지 안해"

다만 밀레이의 급진적인 공약을 향한 우려의 목소리도 끊이질 않고 있다. 정치 분석가 아나 이파라귀레는 AFP에 "거의 150%에 달하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몇 주 동안 상황이 통제 불능 상태로 급속히 확장될 수 있다"며 "이 기간은 매우 불안정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토르쿠아토 디 텔라 대학교의 정치학 교수인 카를로스 제르바소니도 "밀레이는 의회에서 완전히 약해질 것이며, 분명히 자신의 아이디어를 상당 부분 실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사 후보를 지지하던 카타리나 미구엘은 "밀레이는 자신에게 도전하려는 세력을 발견할 것"이라며 "아르헨티나 국민의 절반은 그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특히 20년 만에 최악의 아르헨티나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재정적 고통이 수반된 선택이 불가피하다. 재정 축소는 인플레이션을 더욱 부추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사회불안이 더욱 심해질 수 있다.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페소화 가치가 공식 환율보다 150%나 높은 상황에서 엄격하게 통제되는 페소화의 평가절하가 불가피하다고 애널리스트들은 입을 모은다.

평가절하는 인플레이션을 더욱 급등시켜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이미 5명 중 2명이 빈곤선 아래에 있는 상황에서 이 수치가 훨씬 더 높아지면 거리에 시위대가 넘쳐나고 사회 불안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위험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각) 뉴햄프셔주 클레어몬트에서 열린 선거 행사서 대선 유세를 하고 있다. 2023.11.13 ⓒ AFP=뉴스1 ⓒ News1 우동명 기자

◇미 대륙서 엇갈린 반응…트럼프 "아르헨 다시 위대하게 만들 것"

아메리카 대륙의 전·현직 대통령들은 엇갈린 반응을 내놓고 있다. 현재 아르헨티나 대통령인 알베르토 페르난데스는 "나는 민주주의의 사람이고, 대중의 평결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며 "내일 하비에르 밀레이와 협력해 질서 있는 정권 전환을 보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친 타이완' 우파 성향으로 지난 5월 대선에서 승리한 산티아고 페냐 파라과이 대통령은 "하비에르 밀레이의 승리를 축하하며, 양국 관계 강화를 위해 파라과이의 따뜻한 손길을 내민다"고 전했다.

중도 우파 성향의 루이스 라카예 포우 우루과이 대통령도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당선자에게 경의를 표한다"며 "우리는 함께 노력하고 개선할 일이 많다"고 축하를 건넸다.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브라질 대통령은 "하비에르 밀레이의 승리를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축하한다"며 "남미에서 희망이 다시 빛날 것"이라고 강조했고, '아르헨타나의 트럼프'로 불리는 밀레이의 승리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나는 당신이 매우 자랑스럽다. 당신은 나라를 바꾸고 진정으로 아르헨티나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르헨티나는 지난 2019년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집권으로 중남미의 새로운 핑크 타이드를 이끌었지만, 이번 정권 교체로 좌파 물결에도 균열이 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콜롬비아 최초의 좌파 대통령인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은 "아르헨티나에서 극우파가 승리했다"며 "이는 사회의 결정이지만, 라틴 아메리카에는 슬픈 일"이라고 언급했다.

지난해 10월, 퇴임 12년 만에 복귀한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대통령은 밀레이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채 축하 인사만을 전했다. 그는 "민주주의는 국민의 목소리이며 항상 존중돼야 한다"며 "새 정부의 행운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평화로운 투표 과정을 칭찬하는 말을 전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성명을 통해 "이번 선거는 아르헨티나의 선거 및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증거"라며 "미국은 공동 우선순위에 대해 밀레이 당선인 및 그의 정부와 협력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yeseul@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