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국 통화 가치 급락…'어게인 1997?'

美QE축소·中성장둔화가 신흥국 취약성과 맞물려 통화매도
"1997년 아시아 위기 때의 금융전염과는 달라"

(서울=뉴스1) 최종일 기자 = 터키와 브라질,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도, 러시아의 통화가 24일(현지시간) 모두 급락세를 보였다.

아르헨티나 페소화 급락 이후 미국의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과 중국의 성장 둔화 등 신흥국 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이 부각된 것이 영향을 미쳤다.

특히, 전문가들은 일부 신흥국 국가의 통화 하락세가 다른 국가에 여파를 미치는 부분은 감지되고 있지만 현 상황을 1997년 아시아 위기 때에 등장했던 '금융전염(financial contagion)'으로는 규정하지 않고 있다.

◇아르헨티나 페소화, 한주동안 15% 이상 폭락

이날 아르헨티나는 페소화 가치가 급락세를 보이자 달러화 매입 규제를 완화한다고 밝혔다. 호르헤 카피타니치 대통령실장은 오는 27일부터 예금 및 여행 목적의 달러화 매입을 허용하고, 환전 수수료도 낮출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부에노아이레스 거리에선 정부 정책에 대한 비난이 여전히 나오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보도했다. 시민인 안토니오 로페즈(63)는 "모든 것이 임시변동이다. 정부 관리들은 자신들이 뭘 하고 있는지를 모른다. 인플레이션은 오를 것이다. 나는 달러를 사고 싶지만 구매력이 없다"고 토로했다.

이날 런던시간 오후 5시 현내 페소화 가치는 미 달러 대비 1.73% 하락한 8.02페소를 기록했다. 전일에는 10% 급락했고 한주 동안에는 15.06% 급락했다. 터키 리라화, 러시아 루블화, 인도 루피화 역시 이락 하락세를 보였다. 남아공 랜드화는 장중 한때에 5년래 최저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혼란의 원인은 각 신흥국 내수 사정"

로이터는 신흥국 통화 매도세는 연준의 양적완화 여파가 국가별 특정 문제와 맞물려 벌어진 현상이라고 보도했다. 연준은 이번달에 자산매입 규모를 100억달러 줄였으며, 오는 28~29일에 통화회의를 열고 추가 축소 여부를 결정한다.

특히 FT는 전문가들은 시장의 민감한 흐름을, 1997년 아시아 위기 때에 나타났던 '금융전염'으로 규정하지는 않고 있다고 전했다. 아르헨티나 상황이 촉매가 되긴 했지만 시장 혼란의 근본 원인은 각 신흥국 내부 사정에 있다는 설명이다.

뉴욕 소재 실버크레스트 애셋매니지먼트 매니징 디렉터 패트릭 소버넥은 FT에 "신흥국 통화 매도세가 주목받고 있지만, 이는 지난 한달 내내 일어난 것이다"며 "신흥국 성장 전망이 문제라는 점을 점차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고 지적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신흥국과 선진국 성장 격차가 2001년 이후 최저치로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 21일 보고서에선 올해 선진국 성장 전망치를 종전 2%에서 2.2%로 상향 조정했지만 신흥국에 대해서는 5.1%를 유지했다.

아르헨티나 문제의 핵심은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와 불충분한 외환보유액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이 약 25% 수준으로 치솟으면서 페소화를 달러로 바꾸는 수요가 급증하면서 발생했다.

반면, 브라질과 남아공에서는 문제가 다르다. 중국 금융시스템에 대한 불안감이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성장세가 둔화되고 있는 조짐이 보인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중국은 브라질과 남아공에서 대규모 원자재를 수입하고 있다. 러시아 경제 역시 원자재 가격에 의해 영향을 많이 받는다.

터키와 인도의 경우에는 미국의 테이퍼링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메우고 단기 부채를 상황하는데 필요한 유동성 흐름이 고갈될 수 있다는 우려도 포함돼 있다.

이날 스위스 다보스포럼에 참석한 정부 관리들과 시장 전문가들도 모든 신흥국 시장 상황이 동일한 것이 아니며 시장 혼란으로 인해 투자자들이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국가에서 이탈하고 있다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고 로이터는 보도했다.

◇시장 불안감 증폭…S&P500지수, 2% 이상 급락

다만, 로이터는 시장의 불안감이 다른 곳으로 확산되고 있는 점은 감지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를 안고 있는 보다 취약한 신흥국 시장에서의 통화 약세가 한국의 원화와 폴란드 즐로티화에서도 나타났다.

24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 환율은 전일 대비 6.5원 오른 1080.4원을 나타내면서 5거래일 연속 상승했다. 환율이 1080원선을 넘어선 건 종가기준으로 지난해 9월17일 이후 약 4개월만이다.

신흥국 통화 급락세는 유럽 전역의 주식 시장에서도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 증시는 중남미 경제에 대한 노출 때문에 1.7% 하락했다.

제네바 소재 비 캐피탈 웰스 매니지먼트의 매니징 디렉터 로네 바링은 "신흥국 매도세는 보다 악화된 뒤에 상황이 나아질 것으로 본다"며 "전염이 나타나고 있다. 분위기 측면에서 신흥국에서 선진국으로 넘나들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신흥국 경제의 혼란으로 글로벌 시장에선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짙어졌다. 뉴욕에선 S&P500지수가 전일대비 2.1% 하락, 지난해 6월 이후 최대의 일일 낙폭을 기록했다.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는 1.96% 밀렸다.

반면, 10년물 국채 금리는 5bp(bp=0.01% 포인트) 하락한 2.73%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11월 이후 최저 수준이다. 시장의 불안을 반영하는 시카고 옵션거래소(CBOE)의 변동성 지수(VIX)는 31.8% 급등한 18.14를 기록했다.

유럽 증시 역시 큰 폭의 하락세를 보였다. 범유럽 지수인 스톡스600지수는 2.39% 하락했고, 영국 FTSE100 지수는 1.62%, 독일 DAX30지수는 2.48%, 프랑스 CAC40지수는 2.79%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