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서 밀린 우크라, 러 본토 급습…'1석3조' 효과 노렸다[딥포커스]
사흘째 쿠르스크州 돌파하는 우크라군…수도 모스크바까지 530㎞ 불과
수세 몰린 동부 전선 '숨돌리기 용도'…원전·가스관 위협하고 종전협상도 염두
- 김성식 기자
(서울=뉴스1) 김성식 기자 = 러시아군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급급했던 우크라이나군이 개전 2년 6개월 만에 처음으로 국경을 넘어 러시아 본토를 치자 수비 병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도대체 무슨 이유로 진격을 감행했는지 해석이 분분하다.
우크라이나가 말을 아끼고 있고, 자신들을 지원해온 미국에도 미리 알리지 않아 정확한 진격 의도를 파악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그러나 지난 1년간 교착 상태에 빠졌던 전선이 올해 들어 다시 밀리기 시작한 점을 비춰볼 때 불리해진 전황을 뒤집기 위한 나름의 고육지책을 마련한 것으로 풀이된다.
8일(현지시간)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사흘째 러시아 남부 쿠르스크주(州)를 돌파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의 행보는 수세에 몰린 동부 하르키우주와 도네츠크주 전선에서 러시아군의 병력 일부를 철수시키기 위한 포석일 수 있다고 우크라이나 정부 고위 관료를 인용해 보도했다.
이 관료는 NYT에 "왜 러시아는 (침공해도) 되고 우리는 안 되냐. 우리는 전쟁 중"이라며 우크라이나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군의 공세를 완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귀띔했다. 이어 이번 쿠르스크 진격 작전이 러시아 국경을 겨냥했던 그간의 공격보다 "훨씬 성공했다"고 자평했다.
안드리 자고로드니우크 전 우크라이나 국방장관도 이날 NYT와의 인터뷰에서 영토를 장기 점령하기보다는 러시아군 병력과 자원을 전환하기 위한 의도로 읽힌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전황을 분석해온 폴란드 로찬 컨설팅의 콘라드 무지카 연구원은 이번 진격으로 동부 격전지 도네츠크주에서 러시아군의 공세가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로 지난해 5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남동부 도네츠크주 바흐무트를 점령한 것을 마지막으로 1년 가까이 교착 상태에 빠졌던 전선은 지난 2월 러시아군이 도네츠크주 아우디우카 마을을 수복하고, 5월부터는 동북부 하르키우주와 수미주에서 공세를 강화하면서 우크라이나에 크게 불리해졌다.
쿠르스크는 하르키우·수미와 맞닿은 지역으로 현재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쿠르스크의 국경마을 수드자에서 수도 모스크바까지 직선거리는 530㎞에 불과하다. 러시아로서는 하르키우·수미와 도네츠크 내 병력을 빼서라도 방어해야 하는 지역인 셈이다. 러시아 국방부도 하르키우와 수미에서 고전해 온 우크라이나군이 지난 6일 반격을 개시해 국경을 침범했다며 연방보안국(FSB)과 예비군까지 투입해 추가 돌파 시도를 저지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진격을 통해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의 에너지 인프라를 추가로 타격하려 한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수드자는 러시아 천연가스를 유럽으로 보내는 '우렌고이-포마리-우즈고로드' 가스관의 마지막 수송 측정소가 있는 곳이다. 또한 주도 쿠르스크시(市) 근교에는 구소련 시절 건설한 쿠르스크 원자력 발전소도 자리한다.
이날 미국 CNN 방송은 수드자의 천연가스의 유럽 납품 계약이 내년 1월 종료될 예정이라며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이래 서방 제재에 직면한 러시아에 남은 몇 안 되는 자금줄을 우크라이나가 틀어막으려 했다고 보도했다. NYT도 현지에서 보낸 사진과 영상을 입수해 현재 우크라이나군이 수드자의 천연가스 측정소를 점령한 것으로 추정했다. 운영사 가즈프롬은 천연가스 수출 흐름이 소폭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러시아 군사 블로거들은 우크라이나군이 쿠르스크 원전을 공격하는 시나리오를 가장 우려하고 있다. 블로거 유리 포돌리아카는 이날 우크라이나군이 수드자에서 북동쪽으로 약 60㎞ 떨어진 쿠르스크 원전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군은 지난 3월 러시아 서부 라잔주에 무인기(드론)를 무더기로 띄워 정유시설 등 에너지 인프라를 파괴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우크라이나가 향후 러시아와의 종전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 이번 진격을 감행했다는 시각도 있다. 우크라이나는 그간 종전 방안을 논의하는 네 차례의 차관급 회의와 한 차례의 정상 회의를 개최하면서도 자신들의 영토 보존과 주권 회복을 골자로 한 '평화 공식' 수용을 완강하게 요구하며 단 한 번도 러시아를 초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지원을 반대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공화당 대선후보로 선출돼, 오는 11월 대선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거론되자 지난 7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오는 11월 추진 중인 두 번째 정상 회의에 처음으로 러시아를 초청했다. 이처럼 24년 넘게 집권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달리 서방은 대선·총선 결과에 따라 각국 지도자가 바뀌고 외교 정책이 출렁인다.
CNN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도 아닌 우크라이나에 대한 나토의 지원은 사실 이례적인 일이라며, 전쟁이 4년 차에 접어드는 내년에는 전쟁에 대한 서방의 의구심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로서도 러시아 내 점령지 한 곳 정도는 갖고 있는 편이 향후 종전 협상에서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 점령지와 맞교환 할 수 있어 유리하다.
다만 우크라이나의 진격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러시아 국내 법률상 예비군의 해외 파병은 금지돼 있지만, 자국에 투입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의 계산과 달리 러시아군이 동부 전선에서 병력을 빼지 않고 예비군을 활용해 쿠르스크를 방어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동부 전선에서 고전하고 있어 지금보다 더 많은 병력을 쿠르스크에 투입하긴 어려워 보인다.
우크라이나 최대 지원국인 미국이 러시아 본토 침공을 어떻게 보는지도 중요한 변수다. 미국은 지난 5월 사거리가 300㎞로 늘어난 신형 에이태큼스(ATACMS)를 우크라이나에 인도하면서 자국산 무기를 통한 러시아 본토 공격을 승인했지만, 여전히 확전을 우려해 공격 범위를 러시아 국경 인근으로 제한했다. 미국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는 지난 6일부터 이날까지 우크라이나군이 총 10㎞를 진격한 것으로 추정했다.
일단 미국 정부는 이 정도 진격은 '본토 깊숙한 지역'은 아니라고 보는 분위기다. 이날 로이터 통신은 익명의 백악관 관계자를 인용해 미국 정부가 우크라이나 정부에 진격 작전의 정확한 목적을 설명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이 관계자는 "그들(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와의) 국경 북쪽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우리가 미국산 무기를 활용해 러시아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다고 말했던 곳"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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