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격 슬로바키아 총리 여전히 위중…국가안보회의 긴급 소집(종합)
5시간 수술뒤 중환자실 입원…체포 용의자, 공영방송 폐국에 불만
친러 노선으로 정권탈환 성공…언론·사법 장악에 반정부 시위 일기도
- 김성식 기자
(서울=뉴스1) 김성식 기자 = 로베르토 피초(59) 슬로바키아 총리가 15일(현지시간) 괴한의 총격을 받아 병원으로 이송됐다. 수술은 마쳤지만 상태는 여전히 위중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에 슬로바키아는 국가안보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로이터·AFP 통신에 따르면 피초 총리가 입원해 있는 미리암 라푸니코바 F.D 루즈벨트대학 병원장은 16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밤새 의료진 두팀이 투입돼 5시간 동안 수술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라푸니코바 병원장은 "피초 총리의 상태가 안정됐지만 여전히 매우 심각하다"며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고 밝혔다. 피초 총리의 권한을 대행하고 있는 로베르토 칼리낙 부총리 겸 국방장관은 "총상이 복잡해 상태가 계속 심각하다"며 "상황을 잘 관리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싶다"고 말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슬로바키아 내각은 현지시각으로 16일 오전 11시(한국시각으로 같은날 오후 6시) 안전보장회의를 열고 사태를 논의하기로 했다.
피초 총리 피격은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동쪽으로 약 180㎞ 떨어진 중부도시 한들로바에서 현지시각으로 15일 오후 2시30분쯤 발생했다. 슬로바키아 일간지 SME는 목격자들을 인용해 지역 문화센터에서 내각회의를 마친 총리가 건물 밖으로 나오자 괴한은 악수를 청하며 다가간 뒤 총을 발사했다고 전했다.
총상을 입은 피초 총리는 즉시 헬기에 실려 20㎞ 거리의 반스카비스트리차 소재 F.D 루즈벨트대학 병원으로 이송됐다. 용의자가 쏜 총알은 모두 5발이며 이 중 2발이 총리의 몸에 맞았다. 토마스 타라바 부총리 겸 환경장관은 15일 밤 영국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피초 총리가 근거리에서 복부와 관절에 각각 1발씩 총상을 입었고, 이 중 1발이 복부를 관통했다고 밝혔다.
총격 직후 용의자는 현장 경호원들에 의해 제압돼 구금됐다. 슬로바키아 일간지 데니크 엔은 용의자가 남부 레비체 마을에 거주하는 71세 시인 유라즈 신툴라라고 보도했다. 슬로바키아 작가 협회 공식 회원이며 세 권의 시집을 집필한 바 있다고 한다.
마투스 수타이 에스토크 슬로바키아 내무장관은 취재진에게 용의자의 신상이 언론에 보도된 바와 같다고 확인해 줬다. 용의자의 아들은 이날 슬로바키아 매체 악투알리티에 아버지가 합법적으로 총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범행 동기는 알지 못한다고 진술했다.
페이스북에선 신툴라가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영상이 포착되기도 했다. 날짜 미상의 영상에서 신툴라로 추정되는 남성은 "나는 정부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청산된 매스 미디어, 공영방송사(RTVS)가 왜 공격을 받아야 하냐"며 "왜 사람들이 자리에서 쫓겨나고 얀 자크 국가 사법위원장은 왜 해임돼야 했냐"고 반문했다.
사법당국의 수사 내용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내각에선 용의자가 정치적 동기를 갖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피초 총리의 권한을 대행하고 있는 로베르토 칼리낙 부총리 겸 국방장관은 취재진에게 "이번 사건은 정치적 공격"이라며 "이는 명백한 사실이며 이에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스토크 내무장관도 "최근 일부 집단이 다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며 여야를 막론하고 "소셜미디어상에서 공격과 증오를 중단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피초 총리의 측근인 페테르 펠레그리니 대통령 당선인은 정치적 분열을 총격 원인으로 지목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전례 없는 위협"이라고 규탄했다.
슬로바키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피초 총리 4선을 계기로 극심한 내부 분열에 휩싸인 상태다. 슬로바키아는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일원으로,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되자 상당한 양의 무기를 우크라이나에 이전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자 슬로바키아 국민들 사이에선 전쟁 피로감과 함께 러시아와의 관계 경색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피초 총리는 우크라이나행 무기 선적 중단과 서방의 대(對)러 제재 반대를 공약으로 내세워 지난해 9월 총선에서 당선돼 정권을 탈환했고, 같은해 10월 취임과 동시에 이를 이행했다.
여기에 더해 피초 총리가 △고위공직자와 부패범죄를 수사하는 특별검찰청을 12월 해체하기로 결정하고 △부패 사범의 형량을 낮춰주는 형법 개정을 추진한 데 이어 △지난 3월 공영방송(RTVS) 폐국을 시도하자 정부의 정책에 항의하는 집회가 연달아 열렸다.
피초 총리의 재임은 이번이 벌써 네 번째로 △2006년~2010년 △2012년~2016년 △2016년~2018년에도 총리직을 맡은 바 있다. 본래 공산당의 후신인 민주좌파당(SDL) 소속으로 1992년 처음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4년간 유럽인권재판소(ECHR)에서 슬로바키아 정부를 대표해 활동했지만, 1999년 탈당해 좌파 성향의 스메르-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2006년 총선에선 당시 중도우파 정부의 자유주의 경제 개혁에 반기를 들어 선거를 압승했고, EU 가입 5년 만인 2009년 유로화를 전면 도입했다.
2010년 연정에 실패하면서 실각했지만 중도우파 연립정부가 부패 혐의로 지지율이 크게 떨어진 상태에서 치러진 2012년 총선에서 또다시 압승했다. 시리아 내전으로 촉발된 난민 위기가 유럽을 휩쓸자 반(反)이민 정책들 수립해 2016년 총선에서 연임에 성공했다. 그러나 2년 뒤 마피아와 피초 총리 간 유착 의혹을 취재하던 언론인이 숨진 채 발견되면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날 피초 총리 피격 소식에 각국 정상들은 규탄의 목소리를 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끔찍한 폭력 행위"라며 "피초 총리의 조속한 회복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밝혔고,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정치인을 향한 폭력은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행위"라고 직격했다.
전쟁 중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도 모처럼 한목소리를 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서한을 통해 "극악무도한 범죄는 정당화될 수 없다"며 피초 총리의 쾌유를 기원했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웃 파트너 국가의 정부 수반을 상대로 한 폭력 행위를 강력히 규탄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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