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갈등 또 다시 터진 '캅카스 화약고'…배경과 여파는?[딥포커스]

우크라戰으로 아제르 도움 필요한 러…러 없이 못 사는 아르메
러, 구 소련 앞마당서 영향력 잃어…인근 국가도 분쟁 휘말릴 여지

20일(현지시간) 아제르바이젠 스테파나케르트의 한 아파트가 아르메니아의 공세로 인해 파손된 모습이다. 앞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젠은 분쟁 지역인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두고 충돌했으나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중재로 휴전에 합의했다. 2023.09.20/ ⓒ AFP=뉴스1 ⓒ News1 장성희 기자

(타브리즈=뉴스1) 김예슬 기자 = 오랜 영토 분쟁을 벌여온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재격돌했지만, 하루 만에 휴전이 이뤄졌다. 아제르바이잔이 아르메니아 내 분리주의 세력인 아르차흐 공화국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면서다.

두 국가는 1918년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독립한 이후 나고르노-카라바흐 영유권을 두고 100년 넘게 다퉈왔다. 소련 붕괴 후에도 갈등을 이어오며, 이 지역은 '캅카스의 화약고'로 불린다.

이번 갈등이 아제르바이잔의 승리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러시아에 미칠 영향 등을 외신을 바탕으로 톺아본다.

20일(현지시간)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한 주민이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 국가의 공세를 지지하는 뜻으로 가게 앞에 국기를 걸고 있다. 23.09.20 ⓒ AFP=뉴스1 ⓒ News1 김예슬 기자

◇아제르 사실상 승리...아르메 "우리 軍 개입 않았다" 선 그어

아르메니아계 자치군은 지난달 20일 오후 1시(한국시간 오후 6시)부터 발효된 휴전 협정에 따라 아르메니아군은 분쟁 지역인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또 이 휴전 협정에 따라 아제르바이잔 측과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 분리주의자들은 분쟁 영토를 아제르바이잔의 나머지 지역으로 재통합하는 것에 관련된 회담을 진행했다.

이 합의처럼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의 무장해제, 그리고 아르메니아 분리주의 세력이 통합이 원활하게 이뤄진다면 이 지역의 긴장감도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구체적인 합의는 나오지 않은 가운데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계 주민은 인종청소를 피해 본국인 아르메니아로 돌아가겠다고 밝힌 상태다.

다만 아르메니아 측에서는 자국군이 이번 소요 사태에 개입하지 않았다며 거리를 두고 있다.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는 방송 연설에서 "아르메니아 군대는 이 지역에 있지 않았고, 아르메니아는 휴전 협정 초안 작성에 참여하지 않았다"며 "휴전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파시냔 총리의 이 같은 발언은 이번 사태가 양국 간 충돌이 아닌 아르메니아 내 분리주의 세력과 아제르바이잔 사이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러시아 국방부는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완전한 휴전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으며 러시아 평화유지군과 협력해 합의가 이행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또 현지 상황을 안정시키는 데 필요한 지원을 계속 제공하겠다고 부연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5월25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유라시아 경제연합 정상회의 중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과 회담을 하고 있다. 2023.5.26 ⓒ 로이터=뉴스1 ⓒ News1 우동명 기자

◇우크라戰으로 아제르 도움 필요한 러…러 없이 못 사는 아르메

나고르노-카라바흐는 국제적으로 아제르바이잔 영토로 인정받는다. 문제는 이 지역에 사는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분리 독립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소련에 속했던 양국은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독립했다. 이후 아제르바이잔 내 아르메니아인 거주지인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두고 두 차례 전쟁을 벌였다.

1992년 러시아군이 아제르바이잔에서 철수하자 아르메니아가 이 지역에 전면전을 전개했고, 1994년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CIS·옛 소련권 국가 모임)의 중재로 일단락됐다. 휴전이 될 때까지 양국에서는 약 3만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휴전 후에도 교전이 잇따랐다.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2020년 6주간 전쟁에서 지역 대부분을 장악한 뒤 분리주의 세력은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보호 아래에 이 지역에 머물고 있다.

최근에는 아제르바이잔이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아르메니아를 잇는 유일한 통로인 '라친 통로'에 검문소를 설치하며 양국 간 갈등이 다시 고조됐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전통적인 러시아의 '앞마당'인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흔들리는 틈을 타서 아제르바이잔이 아르메니아를 압박하고 나선 것.

아르메니아는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 압도적으로 의존해 왔다. 아르메니아는 러시아가 주도하는 지역 군사 및 경제 블록인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와 유라시아경제연합(EAEU)으로,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이후 경제적 의존도는 더욱 커졌다. 아르메니아-러시아 무역은 지난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서방의 대러 제재에 따른 재수출에 따른 것으로, 이 무역으로 인한 아르메니아의 실익은 거의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대러 제재로 인해 페르시아만까지 가는 아제르바이잔의 무역 통로가 필요한 상황이다. 특히 아제르바이잔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가스, 에너지 공급에서 러시아의 핵심 대안 역할을 하며 유럽 국가들의 구애를 받고 있다. 더군다나 튀르키예 역시 이번 분쟁과 관련해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는데, 러시아는 아르메니아와 멀어짐으로써 튀르키예의 지지까지 얻게 됐다.

유라시아넷은 "아제르바이잔이 카라바흐를 점령함에 따라 아르메니아-러시아 관계는 최저점에 도달했다"고 평가했다.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을 탈출하려는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의 피난 행렬을 촬영한 위성 사진. 라친 회랑을 따라 차량들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2023.09.27/ ⓒ 로이터=뉴스1 ⓒ News1 권진영 기자

◇러, 구 소련 앞마당에서 영향력 잃어…인근 국가도 분쟁 휘말릴 여지

이번 분쟁은 전쟁 중인 러시아가 어떻게 기존 앞마당에서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줬다는 분석도 나왔다.

뉴욕타임스(NYT)는 "러시아는 오랫동안 분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군사·외교적 능력을 방해했고,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있는 평화유지군이 아제르바이잔의 승리 이후 그들의 역할이 더욱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이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소진된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이 상상했던 헤게모니가 되기보다는 구소련 영토 전역의 사건을 산만하게 지켜보는 구경꾼이 됐다"고 표현했다.

아르메니아 내에서 반(反) 러시아 정서가 커졌다는 점도 러시아를 위협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 중 하나였던 아르메니아에서 반러시아 정서가 터지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자원과 관심이 늘어나는 러시아의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고 전했다.

실제로 아르메니아 분리주의 세력이 항복한 이후,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 있는 러시아 대사관 밖에는 시위대가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을 막지 못한 것에 배신감을 느낀다"고 연호했다.

캅카스 지역에서 권력 공백이 생기며 이란, 튀르키예 등도 분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이스라엘은 튀르키예와 함께 아제르바이잔에 군사 무기와 각종 장비를 제공하고 있다.

정치학자 모하마드 아야톨라히 타바르는 포린어페어에 "2016년 이후 아제르바이잔은 무기 수입의 거의 70%를 이스라엘로부터 받아왔고, 이스라엘로부터 석유의 40%를 들여왔다"고 적었다.

또 아제르바이잔 내 일부 아제르족은 이란 북부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아제르족은 이란 인구의 20%를 차지하기도 한다.

타바르는 "이란은 아제르바이잔이 이란 내 아제르족의 분리주의 운동을 지원함으로써 이란을 '발칸화'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키이우포스트는 "이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꼼짝 못하게 되면서 캅카스 지역의 권력 공백이 다른 곳으로도 확산될 위험이 있다"며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최근 분쟁은 수천 년 동안 정치적 단층선 사이에 끼어 있던 이 지역에 깊은 균열이 나타나는 첫 징후일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yeseul@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