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One] 스위스, 내 삶은 나눔과 함께 천천히 스며들었다-下

OK쌤의 집에서 바라본 몽블랑. ⓒ 옥혜숙
OK쌤의 집에서 바라본 몽블랑. ⓒ 옥혜숙

(제네바=뉴스1) 신정숙 통신원 =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는 데는 공짜가 없었다. 돈과 시간과 배우자의 인내가 필요했다. 벌어들이는 삶에는 인연이 없고, 나누는 삶이 내 적성에 딱 맞았다."

스위스에 사는 한국 아줌마들의 직업 구하기 분투 역시 한국에 사는 주부들처럼 살면서 내내 진행 중이다. 이유는 다양하지만, 누구의 엄마나 아내라는 타이틀이 아닌 오롯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 도전과 과정은 쉽지 않고 실패로 끝나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을 알아가고 우리가 속해있는 사회도 더 알아간다. 그도 때론 잃기도 했고 얻은 것도 있었을 것 같다.

"특별한 직업 때문에 외국 생활을 하는 게 아니고 배우자의 학업이나 취업 때문에 외국 생활을 하게 되는 분들에겐 유럽이 그렇게 녹록한 곳이 아닙니다.

일단 언어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영어가 아닌 여러 가지 언어를 쓰기 때문에 전문적 능력이 출중해도 취업비자를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 급하게나마 도움을 구할 친정도 없는 곳에서 육아까지 겹치게 되면 어느 순간 세상이 자기만 빼고 돌아간다는 느낌이 듭니다. 자아가 없어지는 느낌이지요.

꼭 돈을 버는 것만이 생산적인 활동이 아닐진대 그 순간에는 그것만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길이라는 마음에 머리핀 장사, 김치 장사, 문구 장사도 해보았습니다. 물론 모두 실패로 끝나서 마이너스로 막을 내렸지만, 알게된 점도 있지요. 바로 저의 적성입니다. 버는것보단 나누는데 더 소질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의 경험도 나누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여성분들을 모아 인터넷 카페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엔 외국 생활의 정보를 주고받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어느덧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웬만한 직장 못지않은 소속감이 있고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일에 마음을 나누고 있습니다.

초창기 임신한 회원이 낳은 아이가 벌써 열 살이 되었으니 우리끼린 이모 공동체라고 가끔 말하기도 합니다. 격리 생활이 심했던 초기 코비드 시절 유럽에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또 해마다 바자회를 개최해서 모은 성금으로 성폭력 상담소 부설 쉼터에 수년째 후원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따뜻한 마음이 우리가 내는 최고의 생산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 성폭력 상담소로부터 받은 공로상. ⓒ 옥혜숙

"아이들이 취업과 학업으로 집을 떠난 후, 나는 엠마우스라는 빈민 구호 공동체에서 그릇 정리와 청소를 하는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로 나가는 길이 직업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작게나마 그 사회나 타인을 위해 기여할 수 있다면 우리가 가꾸어가는 '삶'이란 집의 형태, 색깔, 냄새, 온기 등이 달라지는 것 같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조금씩 천천히 변화를 가져다 주는 게 이런 게 아닌가!

"삼사십대를 육아와 형체도 없는 자아 찾기에 집중해서 정신없이 살았다면 오십대가 되어서야 드디어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사십여 가구가 살았던 아파트 주민들에게 연말 카드와 작은 선물을 우편함에 넣으면서 교류를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고, 엠마우스라는 빈민 구호 공동체에 주 1회 나가서 자원봉사를 시작한 것도 그즈음입니다.

기부받은 물건을 정리해서 팔고 수익금을 그분들의 자립에 사용하는 일종의 아름다운 가게 같은 형태이죠. 저는 명품 고물 편집숍이라고 부른답니다. 부랑자처럼 보이던 직원분들이 처음엔 무서워 말도 못 붙였는데 지금은 누구보다도 살갑게 인사하고 안부를 물어줍니다.

'잘 지내?' 라는 물음에 '요즘 어깨가 아파~'라고 대답하니 '고통은 지난날의 행복을 상기시켜주지'라는 철학적인 대답을 들을 수도 있는 곳이지요.

삶에는 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방향이 정해진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지금도 많은 선택 속에서 갈등하고 헛다리를 짚으며 실수를 하고 있지만 이렇게 배워가면서 나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인생이 내 맘대로 안된다는 것을 요즘은 얼마 전에 입양한 강아지를 키우면서 절실히 깨닫는 중입니다.

공부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벌어오라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말을 안들을까요?"

엠마우스. ⓒ 옥혜숙

지금은 제네바 중심을 벗어나 산 아래 동네에서 유기견을 입양해 함께 사는 그의 삶은 평온해 보인다. 그의 책에서 봤던 눈물로 시작해서 한바탕 웃음으로 끝나는 일도 줄어든 것 같다. 많은 이야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의 인생 최고의 밥상과 최악의 밥상이다. 이 에피소드에는 뿌리를 두고 떠나온 이방인뿐만 아니라 우리가 삶 속에서 겪는 어려움, 눈물, 웃음의 삼박자가 딱 맞추어 들어가 있다. 결국엔 웃음, 그의 별칭처럼, 모두 OK다.

sagadawashi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