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눈] '동계AG, 한중일 만의 잔치' 주장에 대한 반론

메달 경험한 국가 역대 최다…문턱 점점 낮아져
대회 무용론 있지만 누군가에겐 꿈의 무대

8일(현지시간)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빙상훈련센터 다목적홀에서 열린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쇼트트랙 여자 500m 시상식에서 태극기가 게양되고 있다. 2025.2.8/뉴스1 ⓒ News1 이승배 기자
8일(현지시간)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빙상훈련센터 다목적홀에서 열린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쇼트트랙 여자 500m 시상식에서 태극기가 게양되고 있다. 2025.2.8/뉴스1 ⓒ News1 이승배 기자

(하얼빈=뉴스1) 안영준 기자 = 제9회 2025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이 지난 7일부터 14일까지 중국 하얼빈에서 치러졌다. '아시아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아시안게임, 그중에서도 겨울 스포츠를 다루는 동계아시안게임은 한중일 3개국 나라의 잔치라는 오명도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선 향후 보다 많은 나라들이 아시아 겨울 축제에 동참할 수 있다는 희망을 확인했다.

겨울 스포츠는 기본적으로 여름 스포츠보다 진입 장벽이 높다. 눈과 얼음이 없는 지역에서는 경쟁력을 갖기가 쉽지 않다. 2024 파리 하계 올림픽에 206개국 1만714명이 참가한 데 비해,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에는 91개국 2871명이 참가한 것만 봐도 확인할 수 있다.

동남아시아와 중동 등 눈 한 번 내리지 않는 나라들이 많은 아시아의 경우 편차가 더 크다. 9회 대회까지 한중일 3개 나라가 따낸 금메달이 전체의 99.5%다. 개최지 역시 일본 4회, 중국 3회, 한국 1회로 한중일이 번걸아 나눠가졌다.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 대회를 개최한 카자흐스탄이 한중일 외 유일한 개최국이었다. 대륙 단위 대회지만 '한중일 운동회'라 불렸던 이유다.

그래서 대회가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았고, '이럴거라면 동계아시안게임이 필요할까'라는 '무용론'까지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14일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핑팡컬링아레나에서 열린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남자 컬링 결승전 한국과 필리핀의 경기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컬링 대표팀 김은빈과 표정민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이날 한국 컬링 남자대표팀은 필리핀을 상대로 5대3으로 패배해 은메달을 획득했다. 2025.2.14/뉴스1 ⓒ News1 이승배 기자
14일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핑팡컬링아레나에서 열린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남자 컬링 결승전 한국과 필리핀의 경기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컬링 대표팀 김은빈과 표정민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이날 한국 컬링 남자대표팀은 필리핀을 상대로 5대3으로 패배해 은메달을 획득했다. 2025.2.14/뉴스1 ⓒ News1 이승배 기자

하지만 현장에서 직접 대회를 취재하며 느낀 바로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여전히 3개 나라의 독식이 이어졌지만, 그 문턱은 이전과 비교해 크게 낮아졌음을 확인했다. 아울러 무용론을 펼치기에는 대회가 갖는 선순환 효과가 꽤 크다는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이번 대회는 중국이 1위(금메달 32개, 은메달 27개, 동메달 26개), 한국이 2위(금메달 16개, 은메달 15개, 동메달 14개), 일본이 3위(금메달 10개, 은메달 12개, 동메달 15개)를 꿰찼다. 한중일의 금메달이 58개로, 전체 64개 중 90.6%를 차지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의 유의미한 지표도 눈에 띄었다. 우선 동계 스포츠 불모지 사우디아라비아와 캄보디아가 참가, 역대 최다인 34개국이 출전했다. 두 나라는 메달권에 진입하지는 못했지만 겨울 스포츠 발전을 위한 의미 있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 외에도 대만이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100m에서 천잉추의 동메달, 태국이 남자 프리스타일 슬로프스타일에서 앙리 비오탕이 동메달, 필리핀이 남자 컬링에서 금메달을 각각 따내며 동계아시안게임 역사상 첫 메달의 역사를 썼다.

대만 선수단 ⓒ AFP=뉴스1

메달 숫자는 미미한 수준이지만 그동안 남의 메달을 구경만 했던 '들러리'에서 포디움 위에 직접 올라 환호하는 '주인공'이 됐다는 건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필리핀은 비록 혼혈 선수가 주축이 된 팀이 메달을 땄지만, 아시아 정상에 오른 것을 계기로 필리핀 정부에서 컬링 인프라에 많은 투자를 약속했다는 뉴스도 들린다.

이들 3개 나라의 메달 획득으로 이번 대회에서 메달을 경험한 나라는 총 9개국이다. 이 역시 역대 최다다.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은 역대 가장 많은 나라가 참가해 가장 많은 나라가 메달을 목에 건 대회인 셈이다.

현장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한 빙상계 관계자는 "한중일과 그 외 나라 간 격차가 시간 대비 크게 좁혀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평가한 뒤 "다양한 나라들이 건강하게 경쟁하면 아시아 겨울 스포츠가 다 함께 발전하는 선순환 구조가 생길 것"이라며 기대를 표했다.

14일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국제 컨벤션 전시 스포츠센터에서 열린 제9회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폐회식에서 제10회 동계아시안게임 개최국 사우디아라비아 네옴시티를 알리고 있다. 2025.2.14/뉴스1 ⓒ News1 이승배 기자

4년 뒤 열릴 다음 대회는 사우디아라비아 네옴시티에서 열린다. 중동 및 서남아시아에서 열리는 첫 동계 아시안게임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눈이 오지 않는 나라지만, 700조원이 넘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인공 눈이 뒤덮인 '사막 속 겨울왕국'을 건설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갖고 있다. 사우디의 '스포츠 워싱(메가 스포츠 대회를 통한 이미지 세척)' 논란과는 별개로, 중동에서의 첫 개최를 통해 중동 겨울 스포츠가 새로운 발전을 위한 변곡점이 된다는 점은 반길 만하다.

카타르 선수단 관계자는 "4년 뒤에는 중동에서 열리는 만큼 우리도 더 많은 선수를 파견할 것"이라 전망하기도 했다. 하얼빈에서 가능성을 확인한 많은 나라들은 4년 뒤 네옴시티에선 더 많은 메달을 겨냥한다.

아울러 동계 스포츠를 향한 상대적 무관심과 '그들만의 잔치'를 이유로 무용론을 주장하는 시선 역시 현장 목소리와는 온도 차가 컸다.

동계 스포츠는 다수의 종목이 국제 대회 출전 기회 자체가 많지 않다. 그래서 관심도 적었던 것인데, 동계 아시안게임마저 이를 이유로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면 이들이 뛸 수 있는 무대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시간은 현저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13일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스포츠대학 학생 스케이트장에서 열린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여자 아이스하키 본선 한국과 일본의 경기에서 일본 마에다 스즈카에게 실점하고 있다. 2025.2.13/뉴스1 ⓒ News1 이승배 기자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4위라는 성적을 낸 여자 아이스하키의 한 선수는 "주변에서 동계아시안게임을 '별 볼 일 없는 대회'로 볼 때 슬펐다. 나는 이 대회에 출전하고 싶어서 2년 동안 대학교를 휴학하고 준비해 왔다"면서 "태극기를 달고 국가대표로 뛴 이번 대회 기간이 참 행복했다"고 했다.

남자 컬링의 한 선수는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놓친 뒤 "처음 출전했지만, 인생에서 마지막일 수도 있는 기회였다"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지난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 대회에선 컬링이 대회 종목에서 빠졌던 바 있다.

하계 올림픽과 하계 아시안게임 등과 비교하면 관심이 떨어질 수 있으나, 그렇기에 오히려 더 일생일대의 기회다.

또 다른 빙상계 관계자 역시 "선수들에게 동계아시안게임은 자신이 TV 중계에도 나오고 뉴스에서도 그나마 화제가 될 수 있는 흔치 않은 시간이다. 그래서 이번 대회를 앞두고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다들 설레고 즐거워했다"고 귀띔했다.

중국 매체 '시나 스포츠'의 마밍주 기자는 "다른 대륙들은 동계 종합대회를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아시아는 그나마 잘하는 것"이라면서 자찬한 뒤 "이제 막 9회째라 부족한 점도 많지만, 그것이 걸음을 멈춰야 할 이유는 아니다. 앞으로 동계아시안게임은 더 많은 역사와 함께 수확을 얻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7일(현지시간)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국제 컨벤션 전시 스포츠센터에서 열린 제9회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축하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2025.2.7/뉴스1 ⓒ News1 이승배 기자

tree@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