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점의 무게를 느끼게 했다"…'우승 못하는 감독' 꼬리표 뗀 염경엽

실패 딛고 최고의 감독으로…"모든 것 걸었다"
"23년 간의 피나는 노력, 드디어 보상 받아"

29년 만의 LG 트윈스를 우승으로 이끈 염경엽 감독이 23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뉴스1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3.11.23/뉴스1 ⓒ News1 김성진 기자

(서울=뉴스1) 이상철 기자 = "우승 감독 염경엽입니다."

LG 트윈스를 29년 만에 정상으로 이끈 염경엽(55) 감독은 뉴스1과 마주한 자리에서 해맑게 웃으며 인사했다.

'가을야구에 약한 감독', '우승 못 하는 감독'이라는 꼬리표를 2023년 마침내 뗀 그는 "그 어떤 우승보다 기뻤다"고 홀가분한 심경을 고백했다.

현역 시절 백업 선수였던 그는 2000년 은퇴한 뒤 프런트 밑바닥에서 제2의 야구인생을 시작했지만 스카우트, 운영팀장, 코치로 승승장구 하더니 단장까지 올라 2018년 SK 와이번스(SSG 랜더스의 전신)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조력했다.

다만 감독으로선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지략이 뛰어난 지도자로 정평이 나 있었지만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고배를 마셨다.

만년 약체인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 히어로즈)를 이끌고 2014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당대 최강 팀인 삼성 라이온즈에 2승4패로 밀려 준우승 했다. 이후 '디펜딩 챔피언' SK의 지휘봉을 잡았으나 2019년과 2020년 연이어 쓴맛을 봤다.

13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2023 신한은행 SOL KBO 포스트시즌' 한국시리즈 5차전 LG 트윈스와 kt 위즈의 경기에서 LG 트윈스가 6대2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LG 염경엽 감독이 시상식에서 최고 감독상을 수상한 뒤 소감을 말하고 있다. 2023.11.13/뉴스1 ⓒ News1 김진환 기자

우승의 한이 남았던 염 감독은 절치부심 다음 기회를 준비했는데, 지난해 말 30년 가까이 우승 못하던 LG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리고 부임 첫 시즌에 LG를 정규시즌 1위에 이어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이끌며 숙원을 풀었다.

그는 "LG와 계약했을 때 부담감이 상당히 컸다. 여기서도 실패하면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LG가 마지막 팀이라는 각오로 모든 것을 걸고 임했다"며 "수많은 시련을 겪어왔는데 이번 우승으로 지난 23년 간의 피나는 노력을 조금이나마 보상받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우리 코칭스태프와 선수단이 채워줘 나를 우승 감독으로 만들어줬다"며 "LG에 있는 동안 함께했던 모두들에게 조금이라도 갚아가며 도움이 될 수 있는 리더가 되겠다"고 덧붙였다.

29년 만의 LG 트윈스를 우승으로 이끈 염경엽 감독이 23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3.11.23/뉴스1 ⓒ News1 김성진 기자

◇결과를 통해 과정을 보여주다

염 감독 역시 자신의 공은 크지 않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는 "LG는 이미 우승할 수 있는 구성을 갖춘 팀이었다. 난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올린 격이었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LG는 2018년부터 꾸준하게 포스트시즌에 오르며 정상권을 유지했다. 그러나 번번이 마지막 방점을 찍지 못하던 팀이었다. 그렇지만 염 감독은 부임하자마자 그토록 힘들던 우승을 해냈다.

염 감독은 부임 후 LG만의 문화를 정착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는 "선수들에게 두려움과 망설임을 없애고 LG만의 공격적인 야구를 펼칠 수 있도록 신경 썼다. 그런 문화를 만들지 못하면 나 역시 LG를 우승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10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수원KT위즈파크에서 열린 프로야구 '2023 신한은행 SOL KBO 포스트시즌' 한국시리즈 3차전 kt 위즈와 LG 트윈스의 경기 6회초 무사 주자 1루 상황 LG 박동원이 역전 홈런을 터트리자 염경엽 감독이 두 손을 번쩍 들어 기뻐하고 있다. 2023.11.10/뉴스1 ⓒ News1 박정호 기자

또 한 가지 선수단에 강조한 것은 '1점'의 소중함이었다. 염 감독은 "1점에 대한 무게를 아주 무겁게 느끼도록 했다. 1점 차로 밀릴 때는 이를 뒤집어 이길 수 있어야했고, 1점 차로 앞설 때는 어떻게든 지킬 수 있도록 했다. 그래야 정규시즌 1위가 가능하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염 감독의 지휘 아래 끝까지 LG는 끈끈한 경기력을 발휘했다. 정규시즌 86승(2무56패) 중 절반이 넘는 42승이 역전승일 정도로 승부를 뒤집는 능력도 뛰어났다. 그렇게 LG 선수단은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쌓였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일궜다.

위기도 있었다. 시즌 초반 선발진과 불펜이 동시에 흔들리면서 위태로운 행보를 보였는데 염 감독은 플랜B를 가동하면서 집중을 했다. 그리고 이 판단은 적중했고, LG는 위기의 5월에 16승(1무6패)을 쓸어 담으며 더 단단해졌다. 염 감독과 선수들 모두 이 위기를 극복하면서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결과에 초점을 뒀던 것이 긍정적 흐름으로 바꾼 셈이다. 염 감독은 "과정이 좋아야 결과가 좋다고 하지만, 프로의 세계에서는 결과를 통해 좋은 과정이 보인다. SK에서 겪은 실패로 생각을 바꾸게 됐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이 내게 올 시즌을 치르는데 엄청난 자양분이 됐다"고 설명했다.

29년 만의 LG 트윈스를 우승으로 이끈 염경엽 감독이 23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뉴스1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3.11.23/뉴스1 ⓒ News1 김성진 기자

◇운명을 바꾼 한국시리즈 2차전

5월에 찾아온 위기를 이겨냈던 힘이 LG의 정규시즌 농사의 풍흉을 결정했다면, 한국시리즈에서는 1패 뒤 치른 2차전이 운명을 바꾼 한판이었다.

LG는 선발 투수 최원태가 ⅓이닝 4실점으로 강판하면서 궁지에 몰렸는데 7명의 불펜 투수가 이어 던져 상대 KT 위즈의 공격을 차단했다. 그리고 1점씩 따라붙더니 8회 터진 박동원의 2점포로 전세를 뒤집었다. 시리즈의 흐름이 바뀐 순간이었다.

염 감독은 "한국시리즈 2차전은 승리를 떠나 정말 많은 걸 얻은 경기였다. LG는 불펜이 강하다는 이미지가 있었지만 큰 무대에서 통할 지는 물음표에 가까웠다. 다들 젊고 경험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펜이 8⅔이닝 무실점을 합작하며 역전승을 일궜다. 이로 인해 엄청난 자신감이 생겼다. 상대와 기 싸움에서 압도할 수 있게 됐고, 많은 전략적 선택도 늘게 됐다"고 복기했다.

LG 염경엽 감독이 8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2023 신한은행 SOL KBO 포스트시즌' 한국시리즈 2차전 LG 트윈스와 kt 위즈의 경기 8회말 1사 2루 상황에서 박동원이 역전 투런홈런을 쏘아올린 뒤 더그아웃으로 돌아오자 환하게 웃고 있다. 2023.11.8/뉴스1 ⓒ News1 이동해 기자

열세 분위기를 바꾼 LG는 3차전에서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 끝에 9회 2사서 터진 오지환의 3점 홈런으로 또 다시 짜릿한 뒤집기를 펼쳤다. 이 승리와 함께 흐름이 LG로 완전히 넘어갔다.

염 감독은 "3차전은 정말 1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경기다. 팬들은 즐겁게 경기를 봤겠지만 나와 선수들에겐 피 말리는 경기였다. 정말 천운이 따른 경기였다. 그렇지만 이 또한 2차전에서 좋은 결과를 냈기 때문에 따라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극적인 승부가 연이어 나왔던 이번 한국시리즈는 어느 때보다 흥미진진했다. 계속 한국시리즈에서 이런 경기를 펼쳐야 한다면 어떨까. 그는 "감독으로서 정말 힘들었지만 또 우승할 수 있다면 그렇게 피 말리는 한국시리즈를 펼쳐도 괜찮을 것 같다"고 웃어보였다.

29년 만의 LG 트윈스를 우승으로 이끈 염경엽 감독이 23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뉴스1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3.11.23/뉴스1 ⓒ News1 김성진 기자

◇명문 구단으로 가는 길

염 감독은 한국시리즈에서 KT를 4승1패로 꺾고 우승컵을 들어 올린 뒤 "내년, 내후년에도 (정상을 향해) 달리겠다"며 LG 왕조 시대를 열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올해가 중요했는데 통합 우승을 이뤄 선수들에게 큰 자신감을 심어줬다. 멘털적으로도 더 강해지는 계기가 됐다"며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LG는 현재 명문 구단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리더의 역할과 융화를 강조했다. 염 감독은 "프런트의와 코칭스태프, 선수단의 각 리더들이 자기의 역할을 다하고 좋은 생각을 갖고 있다. 각 리더들을 잘 연결해주는 매뉴얼과 시스템이 갖춰진다면 내년에는 더 강한 LG가 될 수 있다. 또한 그렇게 융화가 잘 된다면 앞으로 10년 동안 꾸준하게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우승을 도전할 수 있는 팀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13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2023 신한은행 SOL KBO 포스트시즌' 한국시리즈 5차전 LG 트윈스와 kt 위즈의 경기에서 LG 트윈스가 6대2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LG 염경엽 감독, 김인석 스포츠단 대표, 차명석 단장, 임찬규 등 선수들이 우승 트로피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3.11.13/뉴스1 ⓒ News1 김진환 기자

추가적인 설명을 부탁하자, 염 감독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는 "LG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선수단에 좋은 리더가 많다는 것이다. 김현수와 오지환, 박해민, 임찬규, 김진성 등이 후배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고 배운 문보경, 문성주, 홍창기 등이 이를 다시 김범석 등 어린 선수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선수들은 성장하게 된다. 좋은 리더를 통해 승계되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이 중요하다. LG는 이 시스템이 잘 갖춰졌기 때문에 매우 비전 있는 팀"이라고 부연했다.

이어 "감독도 마찬가지다. 내가 팀을 떠날 때 시스템을 이어받을 지도자가 내부에서 나와야 한다. 그래야 팀이 장기적으로 연속성을 갖고 나아갈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리더십을 통해 기존의 장점을 살리면서 실패한 부분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LG는 KBO리그의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명문 구단이 될 것"이라고 했다.

rok1954@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