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버팀목” 외국인 노동자의 고백…'라파엘클리닉' 어떤 곳?

매주 일요일 이주노동자 무료진료…올해 5910명 클리닉 찾아
의료진 "사직 전공의, 의대생 지원자 몰려…통역·진료에 '도움'"

의료진들이 지난해 12월 29일 서울 성북구 라파엘센터에서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진료를 하고 있다. 2024.12.29/뉴스1 ⓒ News1 송원영 기자

(서울=뉴스1) 김규빈 기자 = "새해에는 저도 몸을 회복해서 봉사자로 참여하고 싶어요."

지난 29일 일요일 오전 9시 10분. 서울 성북구 성북동 소재 '라파엘클리닉'은 진료를 받기 위해 건물 앞 난로 앞에 대기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가득했다. 이곳의 일과는 오전 10시에 시작하고, 오후 1시면 끝나기 때문이다. 조금만 늦게 오면 진료 순서가 뒤로 밀린다. 이들에게 라파엘클리닉의 의미를 묻자 "내 삶을 지탱해준 곳"이라고 한목소리로 답했다.

라파엘클리닉은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살인 혐의로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파키스탄 출신 노동자의 편지를 받은 데서 시작됐다. 이를 계기로 이주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깨닫게 된 김 추기경이 그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강조하고 나섰고, 서울대 의대 가톨릭대교수회와 학생회가 힘을 합쳐 혜화동 성당에서 무료 진료를 시작했다. 이후 가톨릭대학교, 동성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교구의 무상 임대로 2014년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의 건물에 자리를 잡았다.

10명 내외의 전문의, 80여 명의 의과·간호학과 봉사 동아리, 자원봉사자들이 중심이 돼 클리닉을 이끌어가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대다수가 유일하게 쉬는 날은 일요일뿐이라 봉사자들은 일요일을 반납하면서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

가정의학과, 내과, 성형외과, 재활의학과, 이비인후과, 치과, 영상의학과 등 대학병원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의료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이곳 외에도 동두천, 천안 진료소 등에서 이주 노동자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

이날 간호사 면허를 보유한 뉴스1 기자는 하루 동안 일일 간호사가 되어 환자 안내, 진료보조 등 라파엘클리닉의 업무를 도왔다. 이날 예약환자는 109명. 클리닉 관계자에 따르면 평소에는 160명가량의 환자가 오지만, 이날은 날씨가 추워 평소보다 적은 편이라고 했다.

오전 9시 30분쯤 클리닉이 문을 열자 진료를 받으러 온 이주노동자들이 한 줄로 서서 봉사활동을 나온 의대생에게 여권 혹은 외국인등록증, 라파엘클리닉 ID카드를 보여주고 입장했다.

다만 라파엘클리닉에 처음 방문한 이주노동자의 경우에는 한편에 마련된 부스로 이동해 ID카드를 만들었다. 이후 환자들은 혈압을 측정하고 초진일 경우 의대생, 사직전공의로 구성된 초·예진실로 이동해 진료를, 예약환자일 경우 진료실로 이동하게 된다.

1층에 마련된 간이 초·예진실에서 의대생과 함께 기자가 처음으로 만난 환자는 몽골인 A 씨. A 씨는 이날 처음으로 라파엘클리닉을 찾았다고 했다. A씨에게 "굿모닝"이라고 말하자, 그는 종이에서 꺼낸 쪽지를 꺼내 읽으면서 "찌르듯이. 쥐어짜듯이 심장이 아파요. 쥐어짜듯이 아파요. 그냥 아파요"라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의대생 이 모 씨가 EMR(전자의무기록)에 A 씨의 증상과 먹는약을 기록하고, 지하 1층에 위치한 내과로 가서 진료를 받으라고 안내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고맙다"는 말 대신 서툰 한국어로 "미안해요. 미안해요"라고 말하며 자리를 옮겼다.

다음으로 만난 환자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방글라데시 국적 노동자 B 씨. 그는 한국인 동료의 소개로 클리닉을 알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한 때 불면증, 우울증으로 알코올중독에 빠지기도 했지만, 클리닉에서 진료를 받고 난 이후부터는 술을 끊었다고 했다.

그에게 클리닉의 의미를 묻자 그는 "이곳이 아니었으면 벌써 무너져내렸을지도 모릅니다"라며 "이곳 선생님들은 저처럼 약하고 힘없고 기댈 곳 없는 사람들도 따뜻하게 대해주고 치료해 주십니다. 언젠가 꼭 보답하고 싶습니다"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지하1층에 마련된 진료실에서도 의료진들이 바삐 움직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환자들이 많이 몰리는 과는 장기적인 약처방이 필요한 내과다. 올해 초부터 지난 10월 31일까지 라파엘클리닉을 찾은 환자는 총 5915명인데, 그중 내과는 2408명, 가정의학과는 1660명, 재활의학과는 398명, 치과는 529명, 이비인후과는 141명 등으로 나타났다.

이날 내과 진료를 담당한 이재동 전 건국대학교 충주병원 병원장은 봉사를 나온 의대생과 한팀을 이뤄 진료를 보고 있었다. 오전부터 그를 찾은 환자만 30명. 대다수는 만성질환자, 경증이기 때문에 소화기내과 권위자인 이 전 병원장에게는 진료에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딱 하나 '외국어'라는 장벽이 있었다.

이 전 병원장은 "환자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싶지만 나이지리아, 이집트, 인도, 가나 등 다양한 국적의 이주노동자들이 클리닉을 찾기 때문에 증상을 알아듣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어떤 처방을 했는지를 설명하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며 "올해는 의정사태가 있었지만, 오히려 환자를 직접 보겠다는 의대생, 사직 전공의들이 클리닉으로 몰렸고, 이들이 통역을 도와주면서 더 많은 환자를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의료진들이 29일 서울 성북구 라파엘센터에서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진료를 하고 있다. 2024.12.29/뉴스1 ⓒ News1 송원영 기자

그때 진료를 다 받고 약을 처방받으러 가던 한 필리핀 국적의 환자 C 씨가 다가와 기자에게 말을 걸었다. 당황한 기색을 표하자 곧바로 필리핀 통역 봉사자 D 씨가 다가와 살가운 표정으로 통역을 해줬고, 이후 그 의미를 알게 됐다.

필리핀 통역 봉사자 D 씨는 C 씨가 "함께 일하는 동료의 추천으로 이곳을 알게 돼, 3년째 다니고 있다"며 "이곳에서 혈액검사를 받은 결과 당뇨라는 사실을 알게됐고, 무료로 약을 처방해줘서 치료도 잘 받고 있다. 제겐 너무나도 감사한 곳"이라고 전했다.

알고보니 필리핀 국적자 D 씨 또한 환자로 라파엘클리닉을 찾았다가 봉사자가 된 사례였다. D 씨는 지난 2014년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얼굴에 골절상을 입어 라파엘클리닉을 찾게 됐다. D 씨의 얼굴을 본 클리닉은 상황이 심각한 것을 깨닫고, 그를 협력 병원으로 보내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도와줬다. 아울러 큰 수술비를 낼 수 없었던 D 씨의 사정에 클리닉과 병원에서는 수술비를 지원해 주기도 했다.

D 씨는 "클리닉에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일도 못하고 어떻게 됐을지 너무 끔찍하다"며 "도움을 받으면 도움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몸이 회복되자마자 클리닉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은 제가 나오지 않으면 '왜 안 나왔냐'고 물어보는 환자들도 많아서, 안나올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현재 D 씨는 이곳에서 필리핀, 영어 통역 봉사를 하고 있다.

기자가 한쪽에서 진료보조, 환자안내를 돕는 와중에도 이곳 클리닉에는 수십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출산, 수술 등을 받을 수 있는지, 오늘은 무슨 과가 진료를 하는지를 묻는 전화들이었다. 클리닉 관계자는 "수술 등은 라파엘클리닉과 연계된 2~3차 병원으로 전원하고 있다"며 "사실 매주 더 많은 진료과를 열고 싶고, 자원봉사자분들께 뭐라도 챙겨드리고 싶은데 정부보조금을 받지 않고 있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클리닉 마감 시간인 오후 1시쯤이 되자 의료진, 의대생, 자원봉사자 등도 바삐 차트를 정리하고, 문 닫을 준비를 했다. 그때 입구에 서 있는 기자에게 한 이주노동자 E 씨가 흐르는 땀을 닦으며 "기차를 놓쳐서 늦게 올라왔어요. 약을 받을 수 있을까요. 너무 아파요"라며 예약 접수증을 보여줬다. 하루 일당으로 받은 햄버거를 먹던 자원봉사자들, 의대·간호대·약대생, 의료진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러자 일순간 의대생들 3명과 직원이 달려와 기록지를 확인하고, 약을 처방했다.

이날 봉사활동을 나온 의료진, 의대·간호대·약대생 등은 의정사태 이후로 꾸준히 라파엘클리닉을 찾았다고 전했다. 의료진으로서의 소명의식을 찾기 위해서라도 새해에도 라파엘클리닉에서 봉사하는 것이 목표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정작 고재성 라파엘클리닉 대표이사(서울대학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새해 목표를 묻는 질의에 정반대의 답변을 내놓았다. 고 대표이사는 "무료진료소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아직 차별받는 이주 노동자들이 많다는 뜻 아니겠냐"며 "언젠가는 우리나라 건강보험 체계 내에서 이들이 치료받을 수 있고, 우리 사회가 좀 더 따뜻해지고 모두 건강해져서 '무료진료소'가 필요없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rnkim@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