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아니라 종말" 뒤숭숭한 12월에 우울 호소하는 시민들 '부쩍'
비상계엄·제주항공 사고 여파 무력·우울 호소 늘어…정부, 심리지원단 구성
전문가들 "'치유의 시간' 없이 비극적 사건 반복…규칙적 일상 유지가 중요"
- 김예원 기자
"연말 모임도, 여행도 취소했네요."
(서울=뉴스1) 김예원 기자 = 서울 동작구에 사는 20대 직장인 이 모 씨는 지난 29일 무안 제주항공 참사 이후 내년 초 계획했던 여행을 취소했다. 비상계엄 후 매년 갖는 연말 모임도 지지부진해지자 새해 기념 여행이라도 가려 했지만 최근 참사로 항공편 등에 대한 불안감이 커진 탓이다.
이 씨는 "분위기를 환기할 겸 여행을 가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며 "연말인데 후련함, 새로움에 대한 기대보다는 무력하고 우울한 마음이 커서 가족, 친구들과 소규모로 조용히 연말을 보낼 것 같다"고 설명했다.
비상계엄 선포부터 무안 제주항공 참사까지 12월 한 달간 뒤숭숭한 정국이 이어지자 무력감과 정신적 피로를 호소하는 시민들이 늘고 있다.
연말연시가 다가오면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 떠들썩한 분위기 속 고립감 등을 느끼는 것은 흔히 있는 현상이지만, 사회적 비극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시민들의 우울감이 가중되는 모습이다.
서울 영등포구에 거주하는 50대 직장인 김 모 씨도 올해 타종 행사를 가지 않고 집에서 조용히 연말을 보내기로 했다. 밝고 희망차게 새해를 보내기보단 추모와 애도로 조용히 연말을 보내는 게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김 씨는 "비상계엄 소식이 좀 잠잠해지나 싶더니 지금은 사고 소식이 계속 들려와 요새 마음이 좋지 않다"며 "다 함께 새해를 시작하는 그 느낌이 좋아 타종 행사를 가곤 했는데 올해는 잘 모르겠다"고 발걸음을 옮겼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도 "뉴스만 보면 암울해서 연말 예능이라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너무 우울하다", "개인적으로도 최악의 해인데 사회적으로도 안 좋은 소식이 많아서 공허하다", "연말이 아니라 종말 온 것 같다"라는 반응이 이어졌다.
정신적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시민들이 늘자 정부도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행정안전부는 이번 제주항공 참사와 관련해 국가트라우마센터에 통합심리지원단을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사고로 심적 고통을 겪는 국민은 누구든지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나 보건복지부 산하 정신건강 위기 상담 전화를 이용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집단적인 우울감엔 최근 발생한 일련의 참사들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 소외감, 한 해가 지나간 것에 대한 공허함 때문에 연말연시에 우울감을 느끼는 것은 으레 있는 현상이지만 계엄, 폭발 사고 등 상황에 노출이 반복되면서 정서적 불안감이 커졌다는 것이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비상계엄 상황뿐만 아니라 탄핵 소추안 표결, 헌법재판관 임명 등 여파로 시민들의 피로도가 극에 달한 가운데 이번 참사가 터져 집단으로 강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보인다"며 "공분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하면 집단으로 이를 해소할 치유의 시간도 필요한데, 그럴 틈도 없이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며 사람들이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비행기를 타거나 가족 여행을 하는 건 누구나 겪는 일상인 만큼 이번 참사를 보고 시민들이 피해자들을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며 정신적 충격을 받을 수 있다"며 "특히 연말연시엔 각종 행사나 명절 준비 등으로 생활이 불규칙해져 무력감, 우울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아 뒤숭숭한 정국에 악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외국에서도 '홀리데이 블루스'(연말 우울증)가 찾아오면 가장 먼저 권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이제 규칙적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라며 "무력함을 떨쳐내기 위해 새로 뭔가를 하기보다는 가족, 지인 등 친밀한 사람들과 소규모로 만나며 마지막 날을 보내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kimyewo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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