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계엄 선포했나요" 쏟아지는 항의에 '멍'든 충암고 학생들
가슴팍 로고 보고 삿대질·욕설도… '교복 자율화'로 숏패딩·체육복 차림
"나쁜 이미지 덧씌워질까 걱정"…학생회 "미래 꿈꿀 수 있게 도와달라"
- 김예원 기자
학교 로고를 보고 욕하는 사람이 있대요.
(서울=뉴스1) 김예원 기자 = 10일 오전 서울 은평구 충암고등학교. 기말고사 시험을 마치고 두툼한 책가방을 멘 학생들이 삼삼오오 교문 밖으로 걸어 나왔지만 교복을 입은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학교 측에서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지난 9일부터 등교 복장을 임시 자율화했기 때문이다.
가채점한 시험지를 든 채 친구들과 집으로 향하던 김 모 군(17)도 그중 한 명이다. 교복 대신 어두운 색의 짧은 기장 패딩에 운동복 차림을 한 김 군은 사복을 입은 이유에 대해 "(안전 관련)공문이 내려와서"라고 했다.
김 군은 "등하굣길에서 교복 로고를 보고 삿대질하며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며 "버스를 타면 교복 입은 친구들이 한두 명 보이긴 하는데 거의 없다. 대부분 사복"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3일 비상계엄 사태에 윤석열 대통령의 모교인 충암고 동문이 무더기로 연루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재학생에게 애꿎은 불똥이 튀고 있다. 학교 측은 매일 120~130통에 가까운 항의 전화와 학생들을 향한 폭언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며 자제를 호소했다.
<뉴스1> 취재를 종합하면 윤 대통령(8회 졸업)은 12.3 비상계엄 선포 당시 충암고 선후배인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7회 졸업),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12회 졸업),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부 사령관(17회 졸업) 등과 구체적 사안을 논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비상계엄 선포 관련 핵심 관계자들이 모두 충암고 졸업생인 것으로 알려지자 일각에선 이들을 '충암파'로 엮어 부르며 비판하기 시작했다. 계엄 선포 다음 날인 4일부터 충암고엔 학생 행정실과 경비 사무실 등으로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쳐라" "어떤 학교길래 그런 졸업생을 배출하냐" 등의 항의가 꾸준히 들어오는 것으로 파악됐다.
교정에서 만난 학생들은 이와 관련해 "억울하다"라는 반응이다. 충암고 재학생이라고 밝힌 A군(19)은 "처음엔 별생각이 없었는데 직접 욕설 등을 들은 후배들이 있다고 하니 당황스럽다"며 "괜히 학교에 대해 나쁜 이미지가 덧씌워지는 게 아닐지 걱정된다"고 했다.
김 군도 "학생들이 계엄령을 내린 건 아니지 않느냐"며 "계엄령과 관련된 사람들이 충암고 선후배라 '충암파'란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저희에게 욕설이나 협박이 날아오면 속상하다"고 토로했다.
인근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B 씨는 "지난주만 해도 충암고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간식을 많이 사러 왔는데 계엄령 이후 하나도 안 보인다"며 "충암고 이야기를 꺼내면 멋쩍게 웃으며 가게를 나가는 아이들도 종종 있었다"고 설명했다.
'충암파'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학생회 차원에서도 자제를 요청하는 목소리를 냈다. 충암고 학생회는 이날 오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발표한 입장문에서 "12·3 사태로 인한 시민의 분노는 학생회 또한 백번 공감한다"면서도 "대통령 등 논란이 된 인물은 충암고를 졸업한 지 40년이나 지났다. 재학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사태 이후 교복을 입은 학생에게 폭언하고 취업에 불이익을 주겠다고 협박하는 피해 사례가 계속 접수되고 있다"며 "충암고 재학생을 향한 비난을 멈추고 학생들이 안전하게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경찰은 학교 측의 우려가 커짐에 따라 관할 파출소에서 2시간마다 순찰을 도는 등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충암고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협박이나 욕설 등에 대해 경찰 신고가 들어온 건은 없다"면서도 "교육청 등의 요청에 따라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kimyewo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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