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성폭행 가해자 신상공개보다 더 중요한 것[기자의눈]
20년 전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 최근 가해자 신상공개로 재조명
피해자 "동의 없는 신상 유포 삼가달라" 호소…일상 회복 우선돼야
- 김예원 기자
(서울=뉴스1) 김예원 기자 = "한공주 학생 있어요?"
2004년 밀양 중학생 성폭행 사건을 바탕으로 2014년 상영된 영화인 '한공주'에 나오는 대사다. 단정히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교과서를 펴고 수업을 듣는 평온한 일상은 성폭행 가해자의 가족들이 교실에 찾아와 교실 앞문을 열고 내뱉은 이 대사를 시작으로 무참히 깨진다.
가해자 측 가족들은 한공주 앞에 몰려와 가해자 선처와 합의를 종용하며 막말을 퍼붓고 난동을 부린다. 교복 조끼를 잡아당기고 책상을 내리치는 이들을 뿌리치며 한공주는 교실 밖으로 도망치지만 주인공의 눈빛은 늘 불안함이 가득하다. 가해는 끝나고 일상은 이어지지만 언제 어디서 손가락질이 날아올지 알 수 없는 탓이다.
지난 13일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최근 유튜브 채널 등에서 밀양 성폭행 사건 가해자들의 신상이 연이어 공개되면서 이 사건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2004년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 발생 직후부터 오늘날까지 피해자를 지원하는 단체 중 하나로, 피해자의 목소리를 대신 전달하는 역할을 도맡아왔다.
현장을 찾은 기자들이 가장 집중한 때는 상담소 관계자가 피해자가 소감을 밝힌 의견문을 대독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피해자는 "가끔 죽고 싶을 때도 있고, 우울증이 심하게 와서 미친 사람처럼 울 때도 있고 멍하니 누워만 있을 때도 자주 있지만 이겨내 보도록 노력하겠다"며 "잊지 않고 관심 가져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다만, 동의 없는 무분별한 신상 유포는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피해자는 "유튜버의 피해자 동의 없는 이름 노출, 피해자 비난 행동은 삼가셨으면 좋겠다"며 "무분별한 추측으로 피해자를 상처받게 하지 말아주시기를 바란다"고 부탁했다. "이 사건이 잠깐 반짝하고 피해자에게 상처만 주고 끝나지 않길 바란다"고도 했다.
피해자가 이처럼 '유튜브'를 콕 집어서 언급한 것엔 최근 일부 유튜브 채널이 '피해자의 동의를 얻었다'고 주장하며 가해자 신상 공개를 이어가고, 판결문 일부 및 피해자 통화 음성 등을 게재한 것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날 상담소 측에 따르면 위 유튜브 채널들은 피해자와 제대로 된 사전 협의 없이 영상을 게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튜브 채널의 이런 '사적 응징'이 대중의 지지와 공감을 받는 이면엔 가해자에 대한 약한 처벌 수위, 권선징악에 입각한 정의 실현 등 다양한 이유가 전제돼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일부 유튜버들은 피해자의 공식 입장이 발표된 직후엔 '정의 구현'을 명목으로 가해자 신상 공개 및 방송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정의의 실현도 성폭력 피해자가 평온한 일상으로 복귀할 권리보다 우선돼선 안 된다. 유튜버들의 가해자 신상 공개도 사안에 대한 공분과 선의에서 비롯됐지만 결과적으로 음성, 가족관계 등 피해자 신상이 의도치 않게 공개되는 결과를 낳았다. 많지는 않지만 댓글 등을 통한 2차 가해도 이어지고 있다. 언제 손가락질이 들이닥칠지 모를 교실 속에 더 이상 피해자를 머물게 해선 안 된다.
kimyewo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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