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외기 위 희미한 발자국 "이거다"…연쇄 빈집털이범 5천㎞ 추적기
[박혜연의 주말한상]서울→수원→평택→부산→거제 차량 바꿔가며 도주
서울 광진서 강력팀 "한번 물면 끝, 나쁜 놈 잡는 것 가장 큰 자긍심"
- 박혜연 기자
"우리 형사만의 촉이 있거든요. 냄새가 났어요. '이건 침입인 것 같다.' 그래서 출근 시간보다 일찍 나와 직원들과 같이 현장에 직접 갔죠."(송대진 팀장)
(서울=뉴스1) 박혜연 기자 = 수개월간 계단식 구축 아파트만 노리고 빈집 12곳을 털어 1억 5000만 원을 훔친 절도범 일당이 꼬리가 잡힌 건 지난 5일. 바로 에어컨 실외기 위에 찍힌 희미한 발자국 흔적 때문이었다. 발자국에 묻은 아침 이슬에 성에가 끼면서 예리한 형사 눈썰미에 걸려들었다.
서울 광진경찰서 소속 송대진 강력2팀장은 지난 22일 <뉴스1>과 인터뷰에서 "아침에 침입 가능성이 있는 경로를 살펴보다가 실외기 위에 발자국이 올라온 것을 딱 확인했다"며 "만약 전날 비라도 왔으면 (흔적이) 다 녹아버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날 과학수사팀이 현장을 이미 다녀갔지만 침입흔을 발견하지 못했던 터였다. 그만큼 깔끔하고 치밀한 범행이었다. 실외기 위 발자국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사건은 미스터리로 남았을 수도 있었다.
형사들은 곧 에어컨 실외기와 가까운 아파트 계단 창문에서 장갑흔도 발견했다. 범행 시간대 폐쇄회로(CC)TV 화면을 분석해 보니 수상한 인물 두 명이 눈에 들어왔다. 한 명이 먼저 아파트에 들어와 다른 한 명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고 근처를 계속 서성였다. 이들은 범행을 마치고는 CCTV 사각지대만 골라 이동했다.
전형적인 침입 절도, 즉 빈집털이였다. 김경태 광진경찰서 형사2과장은 "예전에는 침입 절도 범죄가 잦았지만 요즘은 거의 볼 수 없다"며 "특히 고층 아파트를 어떤 장비도 없이 구조물이나 실외기를 밟고 베란다 문을 통해 들어가려면 바람도 세고 위험해서 많이 해본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범행"이라고 설명했다.
범행을 주도한 건 50대 남성 A 씨. 그는 공범인 B 씨(40대 남성)에게 아파트 건물 현관문을 열고 미리 물색한 범행 장소가 빈집임을 확인할 것을 지시했다. C 씨에게는 도주를 위해 차량을 운전하는 역할을 맡겼다. 이들은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대포폰과 워키토키(생활형 무전기)를 이용했고 차량도 여러 대를 교체해 가며 운영했다.
경찰은 하루하고 반나절 만에 범인들의 차량을 특정하고 추적에 들어갔다. 서울에서 출발한 범인들은 수원, 평택 등을 거쳐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부산까지 내려가는 등 방방곡곡을 누볐다.
송 팀장과 팀원들 역시 나흘간 매일 서울에서 부산까지 출퇴근 수준으로 오가며 계속 차량을 추적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최소 4시간이 걸렸다. 3박4일 동안 송 팀장네 차량이 달린 거리는 약 5000㎞에 달했다. 서울과 부산을 5번 왕복할 만큼의 거리다.
부산에는 아예 1개 팀이 파견돼 상주하면서 곳곳을 훑었다. 부산 출신의 한 형사는 휴가까지 반납해 가며 추적에 나섰다. 그러다 마침내 경남 거제의 한 길거리에서 범인들의 차량과 경찰차가 조우했다.
김 과장은 "(범인들이) 통영을 거쳐 거제로 이동한 것이 확인돼서 부산에 있던 팀을 거제로 보냈다"며 "우연히 마주칠 가능성을 예측했고 '이동 동선이 비슷할 테니 잘 보라'고 전화를 끊는 순간 반대 차선에서 범인들이 탄 벤츠가 보인 것"이라고 말했다.
범인들은 경찰이 차량을 특정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유턴한 경찰차가 벤츠 앞을 가로막았다. 수갑을 들고 내리는 형사들을 보고 나서야 범인들은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급히 차량을 후진시킨 후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돈 벤츠는 그 길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곧바로 뒤쫓았고 한 차례 더 조우했지만, 그들은 또다시 도주했다. 송 팀장은 "그쪽은 안 잡히려고 필사적인데 저희는 교통안전도 고려해야 한다"며 "똑같은 입장이었다면 저희도 아예 (차로) 받아서 밀고 갔겠지만 다른 시민에게 피해가 갈까 봐 가로막기만 했다"고 말했다.
송 팀장은 "보통 그런 상황에서는 힘이 빠지기 마련이지만 우리 광진(강력팀)은 형사들이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다. 더 독기가 생길 뿐"이라며 "어디로 갔을지 찾다가 차 번호판을 청 테이프로 가려서 부산으로 넘어간 것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범인들은 조력자를 통해 다른 차량으로 바꿔 탔지만, 경찰은 그 차량도 이미 파악해 둔 상태였다. 이들의 최종 소재지가 확인된 곳은 부산의 한 마사지업소. 김 과장은 "우리는 검거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이렇게 도주한 다음에 평화롭게 마사지를 받으며 유흥에만 신경 쓰고 있었다는 점이 화가 나더라"고 말했다.
경찰은 신중하게 움직였다. 섣불리 덮쳤다간 다른 손님이나 직원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도 있었다. 퇴로를 먼저 차단하고 13명이 들이닥쳐 수색을 벌였다.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일당들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지?' 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거칠게 반항했지만 결국 범인 모두 검거돼 11일 새벽 서울로 압송됐다.
범행을 주도한 A 씨와 공범 B 씨는 같은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A 씨는 교도소 내 식당에서 함께 일하며 친해진 B 씨에게 '딱 3월까지만 하고 사업 자금을 마련해 수원에 가서 다방 하나 차리자'며 빈집털이 범행을 제안했다고 한다.
지난해 11월쯤 출소한 이들은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서울과 인천, 경기 등 수도권 아파트를 대상으로 거의 매일 절도 행각을 벌였다. 지금까지 피해를 본 것으로 확인된 가구는 12가구뿐이지만 경찰은 이들이 최소 40~50가구에 침입했을 것으로 보고 여죄를 조사하고 있다.
경찰은 또 현장에서 압수된 현금 2400만 원과 귀금속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피해금의 행방도 수사할 방침이다. A 씨와 B 씨, C 씨 등 3명은 구속됐고 이들에게 대포폰과 차량을 제공한 조력자 2명은 불구속 상태로 서울동부지검에 송치됐다.
형사 생활 25년째라는 송 팀장은 "나쁜 놈을 잡는 것이 제일 큰 보람이고 자긍심"이라며 "검거 마지막에 수갑을 채우면서 미란다 원칙을 고지할 때가 제일 짜릿하다"고 웃었다.
김 과장은 "자칫 지나칠 수 있었던 일을 잘 판단해서 수사한 후배들한테 고맙다"며 "처음에 놓쳤을 때 상실감이 컸을 텐데 (직원들이) 굴하지 않고 악바리 근성으로 끝까지 추적해 검거하면서 우리 저력을 보여준 것 같다"고 말했다.
"사건을 해결해서 가슴 아픈 일을 당한 피해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고 보탬이 된다면 형사한테 가장 큰 보람이 아닐까요? 형사는 과거를 수사하지만 마지막에는 현재를 안고 (더 좋은 치안으로) 현재를 앞서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김경태 과장)
hypark@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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